[달구벌아침] 시간 여행
[달구벌아침] 시간 여행
  • 승인 2022.11.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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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BDC심리연구소 소장

나는 어릴 때부터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보통 어린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릴만한 만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만화보다는 유독 여행프로그램을 좋아했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나에게 주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해방이었고, 자유였다.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그때의 나에게 여행프로그램은 해방의 통로였다. 현실을 잊고 싶었고,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말에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다고 그러느냐?' '그 시절엔 다 그랬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쉽게 꺼낼 수 없는 나만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꽤 깊다.

한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보다가 베트남 북부지역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사파(sapa)'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영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고, 그곳에 자연이 있었다. 고산지대라 자연이 너무 아름다웠고, 소수민족 사람들의 때 묻지 않은 미소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꼬마 아이들의 눈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곳의 삶이 여유롭지 않아서 늘 지치고 힘들 텐데도 항상 웃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나의 어릴 적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느꼈다. 신이 눈물을 준 이유가 기쁠 때를 위해서라 했고, 웃음을 준 이유는 슬플 때를 위해서라고 한다. 아이들이 힘든 순간을 어떻게 해서든 잘 이겨내라고 신이 웃음을 선물로 준 것 같다. 화면 속 아이들은 신이 준 선물을 잘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미소에서 고되고 힘듦이 보였다. 어릴 때 내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희망이라는 단어를 놓지 않으려는 간절한 눈빛.

본인은 그렇게 10여 년 전부터 사파를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번 여름 사파(sapa)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에 가서 아름다운 자연도 맘껏 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베트남에 갔고, 하노이를 거쳐 드디어 사파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좀 더 시골 마을인 '타반'이란 동네로 가서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웃고는 있었지만, 그 눈 속에 고됨과 슬픔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내 어릴 적 모습과 너무 닮았다. 어릴 적 난 살기 위해 남을 웃겼던 것 같다. 원숭이 흉내를 내고 코미디언 흉내를 냈다. 싱거운 농담, 웃기는 이야기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날 보는 친구들의 얼굴에도, 가족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하루를 견뎌 낼 수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걸 타인에게 한다고 했다.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친절을 받고 싶은 사람이고, 표현을 살갑게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타인이 살갑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나는 웃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타인들을 웃겨주었던 것 같다. 이번 사파, 타반이라는 소수민족의 마을로 들어가서 그 아이들을 만난 것은 수십 년 전 나를 만나러 간 '시간 여행'이었다. 왜 그렇게 그곳의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었는지, 그곳에 마음이 끌렸는지를 그곳에 가서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었다. 상처받고 삶에 지친 꼬마인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었다. 만나서 나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잘 크거라. 지금은 비록 힘들고 앞이 깜깜해도 너는 기어코 이겨낼 것이고 멋진 어른이 될 터이니 힘내라. 잘 버텨내라. 지혜롭게 지금의 시간을 잘 건너거라."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최소한 그 아이들의 기억에 어떤 외국인이 와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기억만은 남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맨발로 뛰어다니고 씻지 않아 꾀죄죄하고, 옷에는 먼지가 뽀얗고 머리는 떡이 져 있고, 콧물이 줄줄 흐르던 아이들, 외지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나의 말 한마디에 웃고 미소를 보내는 아이들, 내 어릴 적 모습을 닮은 아이들. 그 아이들을 웃겨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행동은 나이 많아 지금은 어른인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어린 꼬마였던 나를 만나,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행동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이전보다 편해졌다. 참 좋은 경험이었다.

살면서 이유 없는 아픔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속에 있는 상처받은 어린 영혼을 만나는 일이다. 상처받은 영혼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위로와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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