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삭힌다는 것
[달구벌아침] 삭힌다는 것
  • 승인 2022.11.0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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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서녘 하늘이 온통 불붙고 있다. 화단의 풀들과 나무들도 하나같이 홍조를 띠며 저녁의 붉은 노을 속으로 타들어 간다. 화단의 가장자리를 지키느라 쌓아놓은 돌담 사이사이로 강아지풀들의 낮은 행렬이 가을바람에 서성인다.
노을빛을 받으며 무태교 다리 위에 오른다. 핏물을 풀어놓은 듯 사방이 온통 붉디붉다. 흐르는 강줄기를 붙들어 잡고 노을이 따라 흐른다.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강물을 등 뒤로 흘려보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3공단으로 들어설 즈음, 붉은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정차 중에 서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두 명의 소녀 아이가 듬성듬성 놓인 가로등 아래 희미한 불빛 사이를 비집고 끝도 없이 이어진 골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둠이 불빛보다 짙고 무거웠으며 침묵했다.
등 뒤에 맨 가방이 아이의 걸음을 휘청 이게 할 만큼 짓눌려 보였다. '괜찮을까. 별일 없겠지' 아이를 백미러 속에 가둔 채 돌아오는 내내 무겁게 짓누르는 마음의 걱정을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제발, 무사하기만을 빌고 빌었다. 맘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쉬이 끊이질 않았다.
저녁 내내 고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생겨난 불안이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것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긴 장마처럼 울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떻게든 삭혀야 하는데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홀로 깬 한낮/ 밥이 홀로를 먹는다// 박새 한 마리 찾아와 방에 창을 달아준다// 커튼 틈으로 칼처럼 밀고 들어온 햇볕이/ 방을 두 동강 낸다// 건너편 홀로에게 말을 걸다가/ 홀로를 데리고 나와 홀로 걷는다// 방충망에 붙은 매미가 안쪽을 구석구석/ 훔쳐보고 있다// 홀로 어두워진 방에/ 술이 홀로를 마신다// 바람이 가끔 들러/ 몰래 옆자리에 앉은 어제를 한 명씩/ 데리고 나간다// 홀로 누워/ 홀로를 덮는다// 귀뚜라미 울음은 언제쯤 멈출까// 잠이 홀로를 벗는다"
침대 머리맡 조명등 아래 놓인 손석호 시인의 '홀로'라는 시의 전문을 펼쳐 읽어 본다. 들끓는 마음이 사그라지길 바라며….
깊어진 가을 저녁, 서울에 혼자 사는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퇴근하는 길이라며 무심한 듯 말했지만 여간해선 먼저 전화 하지 않는 아이라 걱정부터 앞섰다.
"무슨 일 있나?"
대뜸 물었더니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엄마, 배고파"
배고프다는 그 말에 심장이 짓눌리는 듯 숨이 턱에 걸린다.
얼마 전, 아이가 내게 했던 말이 지금껏 목에 걸린 가시처럼 박혀 있던 터였다. 여태껏 그 가시를 빼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더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저 하늘을 건너 아이 곁으로 날아가 저녁밥을 지어 먹일 수 있다면….
"엄마,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집까지 일거리를 들고 와서 해도 끝이 없어. 먹는 것도 그래. 혼자 살면 맘껏 골라 먹고 살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피자 한 판을 못 시켜 먹어. 왜냐면 반도 넘게 버려야 하거든. 치킨도 그렇고 해물찜 같은 건 아예 먹어볼 생각조차 못해. 혼자서는."
어슐러K 르 귄의 소설 '라비니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시간의 반은 울기 직전이나 울면서 보냈고 그것에 진력이 나 버렸다. 시인을 빼곤 세상에 내가 얘기할만한 나를 이해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지만 우리는 이따금 얘기할만한 사람, 이해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냥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 라비니아에게는 시인이 있었듯 우리에겐 무엇이 또 누가 있을까.
요즘 따라 기분이 그냥, 그럴 때 내 편이 되어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필요할 때 누군가의 어깨를 잠시 빌려서라도 기대보는 건 어떨까. 어둠 속에서 홀로 외롭고 힘들 때 문밖으로 나가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타들어 가는 속을 달빛 속에 희석하듯 쏟아붓고 휘휘 저어서라도 삭힐 수만 있다면.
생사를 넘나드는 자들에겐 길고 먼 고통의 시간이겠지만 어둠의 속살은 여전히 여리고 평온하다. 아랫집 언니가 잘 삭힌 감이라며 한 광주리 가득 현관 앞에 가져다 놓고 가는 발걸음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가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상현달 곁으로 낮 동안 갇혀있던 별들이 풀려난다. 드리워진 커튼 사이를 비집고 뭉근하게 새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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