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태풍이 머문 자리
[달구벌아침] 태풍이 머문 자리
  • 승인 2022.11.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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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거리마다 엔 온통 뿌리에서 벗어난 플라타너스 잎들이 만장처럼 흩날린다. 더러는 포댓자루에 담겨 나무 밑동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지나가는 바퀴를 따라 갈팡질팡 뒤죽박죽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끈 떨어진 연처럼 허겁지겁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서성이는 이파리들의 풍경 속으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베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흡사 내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주말엔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예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나보낸 후 우린 근처 카페에 들어 차를 마셨다. 피곤함이 물밀듯 밀려왔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뭔지 모를 휑하고 허한 헛헛함이 남아서였다. 잠시나마 자식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몸의 수고와 마음 씀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나누고 싶었다.

“아들 보낸 소감이 어때?”

내가 먼저 물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시원섭섭한 이 기분은 뭘까?”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 위로 또다시 맺히는 이슬이 슬며시 비쳤다.

“그렇지. 나도 그랬으니까. 보내고 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이더라.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 역시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배우고 익혀 다져야 하는 것들이 더 늘어난 것 같아”

지난여름 골목 안 끝 집이었던 우리 집 감나무 위로 ‘힌남노’가 지나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처음부터 제자리를 지키던 것과 새로 생겨난 것들 사이, 옛것과 새것 사이, 잘라낸 나무와 나무 사이, 곁가지가 돋아나면서 틈이 생겼던가 보다. 서로 어우러지지 못한 채 움푹 팬 곳이 썩어 들고 있을 즈음 밤새 내린 집중호우에 수십 계절 거뜬히 버텨오던 감나무의 반쪽이 그만 툭 부러지고 말았다.

채 익기도 전, 떨어져 나간 가지에 매달린 수많은 어린 감들, 덜 여문 풋감들이 마저 단단하게 여물기 위해선 몇 날을 더 기다려야 했다. 여름의 끝자락, 가을 문을 코앞에 두고 그만 일을 당하고 만 것이다.

퇴비도 못되고 소각도 안 되는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래야 겨우 쓰레기통 속이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까치밥이 되기 위한 꿈을 키워가던 감들이 그저 측은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감나무 아래 서서 ‘어린 감들 모두 어디로 가나?’ 애태우며 종종걸음이던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한시름 덜었겠다. 후유”

‘자연이 혹은 신이 있어 눈여겨보시고는 도와준 것일지도 모르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이 감나무와 닮아있었다.

어찌 먹여 살릴까를 밤낮으로 고심했을 나무엔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단 책임감의 무게로부터 때론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식들 챙기느라 바빠 가장의 노고까진 미처 돌아보지 못했구나 싶어 떨어져 뒹구는 감나무 이파리처럼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 자식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가훈처럼 새겨 머리맡에 걸어 두었다.

잎사귀들에 가려져 있던 나무들의 속내가 입영 전, 막 이발하고 나온 청년의 머리처럼 훤히 드러나 보인다. 불에 덴 화상 자국처럼 떨어져 나간 감나무의 상처에도 세월의 더께가 덧대어져 새살이 돋은 듯 아물고 있다.

이파리들 모두 떨어낸 가지 끝엔 까치밥 두어 개 남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한다. 그마저도 다 떠나고 나면 가슴엔 나이테 한 줄 오롯이 새겨지겠지.

‘너는 세상 어디에 있는가.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는가?’ 마르틴 부버가 ‘인간의 길’에서 물어온다. 때로는 거세게, 때로는 담담하게 와 닿는 이 물음을 통해 저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 가늠할 수 있을 것이리라.

한 계절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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