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숙경 개인전…30일까지 풀꽃갤러리
장숙경 개인전…30일까지 풀꽃갤러리
  • 황인옥
  • 승인 2022.11.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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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풍경보다 이면에 있는 존재가 더 중요”
새벽녘·안개 등 ‘모호성’에 상상력 확장
종이 뒷면 색칠한 배채법 통해 깊이 더해
그림엔 감정 정제하는 비움의 미학 필요
“제 작품이 상상력 자극하는 단초 됐으면”
장숙경 작 '새벽녘 지저귐' 연작
장숙경 작 ‘새벽녘 지저귐’ 연작

수직하면 깊이감, 수평하면 공간감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이다. 장숙경은 여름의 제주 바다 풍경에서 흔히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깼다. 화창한 날씨에도 제주 바다는 습도로 인해 수증기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바다와 하늘이 안개에 휩싸였다. 그로 인해 하늘과 바다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더 넓게 펼쳐져야 하는 수평선에서 공간감 대신 깊이감을 경험했다. 그 현상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연작으로 시각화했다. 수평선에서 ‘깊이감’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것에 대한 시각화였다. 그는 4년전 가족을 따라 대구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뿌연 안개로 탁 트인 수평선은 사라졌고 알 수 없는 깊이감이 차고 들어왔어요. 그 풍경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됐어요.”

그의 새로운 발견은 작품 ‘새벽녘 지저귐’ 연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방안에서 꿈결인 듯 들렸던 새벽녘 새들의 지저귐에서 감각의 확장을 경험했다. 새의 노랫소리에서 청각은 물론이고 시각, 촉각, 의식까지 활성화됐다. “모든 감각기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를 통해 경험했고, 그로인해 오히려 시각적 상상력이 확장되었어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며 인식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장숙경 작가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새벽녘 지저귐(Dawn Chorus)’전이 풀꽃갤러리 아소에서 진행 중이다. 전시에는 이른 새벽 새들의 지저귐을 매개로 창 밖 풍경을 표현한 ‘새벽녘 지저귐’ 연작과 안개 낀 바다의 수평선을 표현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연작이 걸렸다.

전시작들은 새벽녘이나 안개 낀 시점들을 포착한 풍경들이다. 어둠이나 안개에 가려진 ‘모호성’과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찰나적 시간성’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그가 감각한 모호성은 암녹색과 암청색의 덩어리들 혹은 옅은 안료의 층위로 구축되어 있다. 구체적인 형태보다 안개나 어둠으로 드러나는 공기의 밀도감에 집중한 결과다. 종이의 뒷면에 색을 칠하여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도록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해 깊이를 더했다.

동트기 직전이나 안개 속 풍경은 가시적인 존재들과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극적으로 대치하는 순간이다. 시각적으로 인식이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경계 지점이나 찰나적으로 사라질 순간이지만, 가려진 것들 그 속에서 오히려 감각기관이나 의식적인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작가 역시 그런 현상을 경험했지만 경험 자체에 방점을 찍지는 않는다.

‘새벽녘 지저귐’은 3열 9개, 총 27점의 작품들로 구성됐고, 작품 ‘깊이를 알 수 없는’은 전시장 입구 벽면에 가로로 5개의 작품을, 교육 공간 벽면에 세로로 2개의 작품을 각각 배치했다. 개별적인 작품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가 세상을 감각하고 기록한 에세이 같다. 그가 매일 매일 감각한 단상들을 5호 이하의 규모로 시각화 한 까닭이다. 하지만 일상 속 짧고 간결한 단상들이 유기체로 연결되면 그가 인식했던 일상들은 대서사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앞의 작업을 할 때 다음 작업의 단초가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이야기가 연결되었어요.”

대개의 작가들은 한 화면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그는 매일의 기록을 담담하게 이어간다.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기보다 관조적인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려는 태도에 의한 작업 방식이다. 매일 조금씩 객관적인 서사들을 축적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로 연결되면 그가 경험했던 사유의 층위만큼이나 서사의 밀도 또한 깊어진다.

그가 “비움의 미학”을 언급했다. “그림에도 비움의 미학이 필요한 것 같아요. 감정을 오롯이 쏟아 붓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정제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작가는 작품 속 풍경이 제주 풍경으로 제한되는 것에 경계심을 표했다. 제주가 아니더라고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나 새벽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감각한 풍경이라는 점이다. 일상에서 주변 환경을 대하는 열린 시선이나, 날씨나 시간의 변화 등의 자연 현상을 감각하려는 태도, 순간을 느끼려고 잠시 멈춰서는 여유로움 등은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을 환기하게 하고 익숙한 것을 새삼스럽게 새롭게 바라보는 태도”였다.

“구체적인 풍경보다 그 이면에 가려져 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암시 같은 내용들이 지금의 저에겐 더 중요하죠.”

일상에서 자연을 사유하는 태도는 또 다른 작품인 ‘나의 꽃(Flowers of One’s Own)’ 연작에서도 포착된다. 코로나 19로 인해 전에 없던 상황에 무기력함에 대한 자가 치유적인 과정을 전개한 작품이다. 코로나 여파로 비일상화가 시작됐고, 탐탁지 않은 고립 상태에 놓여지면서 일상의 순간과 미술의 관계에 주목하게 됐다.

이 시기 그의 치유책은 산책이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이라고 한 걷기의 인문학을 펼친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걷기는 그에게 바느질처럼 다가왔다. 동네를 산책하며 돌담 밑에 핀 봉선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어린시절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드로잉 작업을 구상했다. 봉선화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듯이 봉선화 꽃잎으로 종이에 점을 찍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꽃물이 옅어지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은 사라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죠. 마치 손톱에 물들인 봉선화 꽃물 자국이 손톱을 깎을 때마다 짧아져가는 것이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말이죠.”

‘나의 꽃’ 연작은 한 해의 봉선화꽃이 피고 완전히 질 때까지 계속됐다. 지난 2년간 매일 관찰일지를 작성하듯 무려 200여점의 드로잉을 완성했다. 그에게 봉선화꽃은 하나의 결과이기에 앞서 과정 그 자체로 다가왔다. “꽃 피기 직전의 봉우리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실은 떨어진 꽃잎이나 시든 꽃잎, 씨가 떨어져 새롭게 틔운 싹까지, 매 순간 모두 아름다웠어요.”

‘새벽녘 지저귐’이나 ‘나의 꽃’ 연작이 자연에서의 깨달음과 치유 등의 보다 사유적인 작업이라면 또 다른 작업인 ‘연금술적 드로잉(Alchemical Drawing)’ 연작은 종이와 흑연의 물성에 대한 연구의 산물이며 내용적인 토대는 개념에 기대고 있다. “종이 위에 정착을 위한 중간 매개(아교, 픽사티브 등의 정착액) 없이 흑연의 검은색을 얼마나 혹은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하고, 종이라는 지지체와 미디움으로서의 흑연을 구현하는 방법론적 탐구의 과정이 결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이다.

자연으로부터 촉발한 사유의 결정체이든, 물성에 대한 연구를 통한 개념적인 접근이든 그가 작업을 통해 궁극에 두는 가치는 각자 개인의 삶이 어떤 감각의 경험을 통해 조금씩 윤택해 지는 것이다. 그러한 윤택함을 위해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초로서 기능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이다. “사람들이 제 작품을 통해 차분한 자신과 대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조금 더 넓게 혹은 조금 깊이 열어가기를 바래요. 그것이 제가 믿고 있는 미술의 작용이라고 생각해요.” 전시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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