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칼럼] 밀봉된 시첩 서가에 꽂은 류우복 시인
[화요칼럼] 밀봉된 시첩 서가에 꽂은 류우복 시인
  • 승인 2022.11.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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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홍란 시인·문학박사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헤르만 헤세 시,「행복해진다는 것」부분-

대구스타디움 야외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시가 있는 가을 음악회’를 앞두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신음의 해독은 난해했다. 소리는 들렸다 끊어지길 반복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단어에 따라 나의 응대 또한 바뀌고 있었다. 크고, 짧고, 간단하게. 그는 언젠가 칠곡 어디 즈음에서 낭송을 하는 나를 본 적이 있었고, 이번 시음악회에서 본인의 작품을 연주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다.

발신의 주인공은 류우복 시인이다. 미수(米壽)에 첫 시집을 낸 시인, 류우복 선생은 구순을 바라보는 노당익장(老當益壯)으로 내 기억에는 저장되어 있었다. 당당하게 그러나 불안함을 다 감추지 못한 목소리의 전언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사소한 핑계의 가능성을 내려놓게 했다.

류우복 시인의 작품「어버이 날」을 틈날 때마다 읽었다. 쉽게 읽혔지만, 쉽게 외워지지는 않았다. 한 편의 작품 속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스며있는데,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시각과 청각은 물론 동원할 수 있는 공감각을 활용하며 시에게로 다가가기로 했다.

행사 당일, 제주로부터 북상하는 비소식이 들렸다. 야외공연에 대한 불안이 하늘에도 전해졌는지 고맙게도 흰구름덩이는 실로 묶어둔 듯 흔들리지 않으며 쾌적하게 잘 견뎌주었다. 외곽의 공연장을 어렵게 찾아온 사람들로 자리가 그득해진 그 여백을 시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류우복 시인의 작품「어버이 날」낭송자인 곽홍란 시인과 아코디언 연주자 황인동 시인으로 소개되고 무대에 섰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기량을 발휘하며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재즈 시낭송이다. 객석 맨 앞자리에 앉은 류우복 시인의 손이 가끔 눈가를 쓸어내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닷새쯤 지났을까. 시인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비닐로 감싼 화선지 두루마리를 고무줄로 고정시킨 후 박스에 담아 책장에 꽂아둔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니 화선지에 붓으로 써서 무대에서 퍼포먼스로 연출했던 나의 시첩(詩牒)이었다. 그냥 힘든 걸음하셨을 노시인께서 돌아가는 길에, 또는 가족들과의 저녁 시간에, 누군가 하루의 여정을 물었을 때, 즐겁게 담소 나눌 수 있었음 하는 바람으로 드렸을 뿐인데 시인의 생각은 나보다 훨씬 더 깊었다. 거실 서가에 시첩을 비닐로 밀봉하여 당당하게 꽂아둔 것이다. “내가 가고~ 한 5대쯤 가서~ 어떤 한 녀석 눈에 띄어~ 우리 집안에 이런 어른이 있었구나. 한 번쯤 이야깃거리라도 되라고.”

구순의 나이에도 아침 산책길에 펜과 메모지는 꼭 챙겨서 나간다며 시상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해 둔다는 시인, 맑고 편안한 인상만큼 말씀에도 평온이 깃들어 있는 시인, 칠순만 되어도 하던 일을 하나 둘 접는 사람이 많은데 지금도 대구문협, 군위문협, 수성문협 등에서 활발하게 문단 활동 중인 시인, 88세인 미수에 첫 시집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을 상재하고, 또다시 다음 시집을 설계하고 있는 시인, 어린 시절 고향의 이야기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피폐, 8·15 광복, 6·25 한국전쟁 그리고 4·19, 5·16 등 격랑과 파란(波瀾)의 징검다리를 건너와 이제는 담담하게 들려주는 시인, 그러나 아직도 동심으로 살아가는 시인, 그와의 대화는 자각과 자율의 시간이다.

헤르만 헤세는 시 「행복해 진다는 것」에서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행복하게 살라는 한 가지 의무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이유라고 말한다. 온갖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깨우침을 위한 덕목을 갖고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류우복 시인이 희망하는 세상은 조화로운 영혼의 시가 울려퍼지는 좋은 세상, 올바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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