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모두가 방관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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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정우
  • 승인 2022.12.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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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그남자좋은간호사
 

“아무도 막지 않았으니까”

찰스 컬런. 16년 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수액에 주사바늘을 꼽아 인슐린과 디곡신을 몰래 투입하는 수법으로 400명의 환자를 살해한, 그러나 사형을 면하기 위해 29명의 살인을 인정한 희대의 범죄자이다. 그와 마지막으로 근무했고 인간적 교감을 나눈 집중치료실 간호사 에이미가 왜 그랬어요? 라고 묻자, 그는 아무도 막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찰스 컬런의 범죄행각을 다룬 영화 ‘그 남자, 좋은 간호사’는 CPR을 지켜보는 찰리의 감정 없는 눈빛으로 시작한다. 그에게서 환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나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다. 외려 자신이 실행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한 태도. 심지어 사망한 환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정도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게 가능했을까?

범행이 꼬리를 잡힌 2003년 파크필드기념병원에 찰스 컬런은 ‘경험 많고 추천서도 훌륭한’ 간호사로 입사한다. 9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범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추천서까지 써준 병원들. 즉 대부분의 병원이 의구심을 품었지만 어느 한 곳도 그의 범행을 저지하지 않았다. 다만 컬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병원들은 입을 닫았고, 변호사를 고용해 인사서류 유출을 막았으며 의료사고 신고를 미루거나 내사결과 공개를 꺼리면서 병원 이익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것. 무려 400명의 환자가 의문의(그러나 동일한 증상과 수법으로)죽음을 맞았는데도 말이다.

유태인 600만 명 학살을 저지를 당시, 히틀러에 동조한 독일 국민은 불과 10%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나치에 저항한 국민도 10% 수준에 머물렀다. 즉 80%가 침묵하는 다수였다. 히틀러가 일자리와 상공업 독점을 비난하며 유태인에게 적개심을 보일 때, 마침내 적들을 모두 청소해야한다고 주장할 때도 사람들은 그를 멈추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치의 만행 앞에서 침묵한 독일 국민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침묵하는 다수야 말로 히틀러를 게르만신전 위에 올렸고 야욕을 꿈꾸게 만들었으며 학살을 묵인한 장본인이었다.

일본의 이지메 연구자는 사람들은 학교폭력의 원인을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선생님에게서 찾으려 하지만, 실은 폭력의 원인도 폭력을 멈추는 힘도 모두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다수에게 있다고 말한다.

찰스 컬런은 병원의 약품 관리시스템 PIXYS의 허점(약품을 신청해 꺼낸 후 바로 취소를 누르면 기록이 남지 않는다)을 이용해 인슐린과 디곡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찰스 컬런이 근무한 모든 병원은 그가 근무할 때 급증한 환자사망률이 그의 퇴사 이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그가 특정 약품 신청을 상습적으로 취소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도 그 사실을 공개하거나 멈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그 결과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24년 3월 뮌헨의 한 언론인은 히틀러 현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공포가 이성을 압도하리라 믿는 선동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은 그를 방관하는 것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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