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이다. 또한 마감이다.
삶의 이 지점에 이르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얼핏 되돌아볼 좋은 기회의 시간이다.
글을 쓰다 말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서보기로 한다.
모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불어오는 시린 바람처럼 삶의 씨줄과 날줄 사이사이로 햇살이 온기를 더하며 융해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각각의 호주머니 속으로 양손 푹, 찔러 넣고 두 발을 털신 안으로 구겨 넣은 채 제자리걸음 중이다.
마음속으론 연신 ‘괜찮다 괜찮아질 거야’ 혼잣말인 듯 주문처럼 흥얼거려 본다.
발목까지 뒤덮은 롱 파카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음에도 훤히 드러난 무방비 상태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냉기까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고드름처럼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모자를 끌어와 덮어쓰려던 그 순간, 나를 향해 젊은 여자가 다가온다. 낯선 그녀가 다짜고짜 전단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저, 잠깐만 시간 내서 제 말 좀 들어 주면 안 될까요?”
때마침 주황색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휙, 고개를 돌려 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빗장 치듯 사선으로 덩달아 두 귀를 닫아 걸었다.
미세한 틈이라도 엿보이게 한다면 그 틈을 비집고 들이친 그녀의 말에 내가 설득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더군다나 거절을 잘 못하는 나로선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쌓는 건 힘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듯 힘겹게 쌓아 올린 둑을 무너뜨리게 하는 건 사소하지만 아주 작은 틈이란 걸 충분히 경험한 뒤였기에.
일그러진 나의 표정에 비해 그녀는 ‘아, 네 괜찮아요.’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띠며 다음 사람 곁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서 하는 일일 거야 분명.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토록 기쁨에 찬 발걸음이며 행복한 표정을 짓기란 어려운 일일 테니.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어. 당당했어. 짐작건대 돈을 받고 하는 일 같지는 않아 보였어. 봉사가 아니고선 힘든 일이지.’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건너다니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 ‘말은 들어주지 못해도 그녀의 손에 쥔 전단이라도 받아 줄 걸, 그랬다면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내 맘에 종이 한 장 정도의 온기나마 데울 수 있었을 텐데….’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것이 뭐든 간에 단 하나, 믿는 곳이 있다면 어떤 일에도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가능케 하고 죽음마저 기꺼이 내주고도 아깝지 않을 마음이 들게 하지 않을까.
설사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가졌다는 기억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종착역인 듯, 한 해의 끝에 서 있다. 십이월 삼십일일이며 마감이다. 종착역에 다다라 차에서 내릴 즈음이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두고 내린 것은 없는지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시라”
이맘때쯤이면 찾아가던 시골 할머니 집 겨울밤이 그립다. 이불 하나를 같이 덮고 사랑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날 새는 줄 몰랐던 그때, 그 아랫목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그리워진다.
추운 겨울을 데우는 건 결국 온기 뿐, 사랑이다. 꽃이 아님에도 꽃이 붙는 말처럼 눈꽃이 핀 겨울밤에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웃음꽃이 만발하게 피어오르던 그때가 몹시도 그립고 그립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세상의 일상은 여전히 무사하다. 그 무사함 안에 수없이 많은 각양각색의 스토리들이 들앉아 있다. 스토리는 길이며 삶이다.
한해의 끝에 서고 보니 후회와 반성이 번갈아 인다. 내 삶의 스토리는 어떻게 쓰고 채울 것이며 그 스토리의 마지막 날, 어떤 문장 부호를 찍을 것인가 생각해본다.
뭘 입어도 시리고 뭘 먹어도 허기가 진다. 어수선한 일상과 마음을 다잡고 앉아 지나온 길들과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내 머릿속을 관통하고 스쳐 간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삶의 이 지점에 이르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얼핏 되돌아볼 좋은 기회의 시간이다.
글을 쓰다 말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서보기로 한다.
모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불어오는 시린 바람처럼 삶의 씨줄과 날줄 사이사이로 햇살이 온기를 더하며 융해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각각의 호주머니 속으로 양손 푹, 찔러 넣고 두 발을 털신 안으로 구겨 넣은 채 제자리걸음 중이다.
마음속으론 연신 ‘괜찮다 괜찮아질 거야’ 혼잣말인 듯 주문처럼 흥얼거려 본다.
발목까지 뒤덮은 롱 파카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음에도 훤히 드러난 무방비 상태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냉기까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고드름처럼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모자를 끌어와 덮어쓰려던 그 순간, 나를 향해 젊은 여자가 다가온다. 낯선 그녀가 다짜고짜 전단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저, 잠깐만 시간 내서 제 말 좀 들어 주면 안 될까요?”
때마침 주황색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휙, 고개를 돌려 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빗장 치듯 사선으로 덩달아 두 귀를 닫아 걸었다.
미세한 틈이라도 엿보이게 한다면 그 틈을 비집고 들이친 그녀의 말에 내가 설득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더군다나 거절을 잘 못하는 나로선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쌓는 건 힘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듯 힘겹게 쌓아 올린 둑을 무너뜨리게 하는 건 사소하지만 아주 작은 틈이란 걸 충분히 경험한 뒤였기에.
일그러진 나의 표정에 비해 그녀는 ‘아, 네 괜찮아요.’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띠며 다음 사람 곁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서 하는 일일 거야 분명.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토록 기쁨에 찬 발걸음이며 행복한 표정을 짓기란 어려운 일일 테니.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어. 당당했어. 짐작건대 돈을 받고 하는 일 같지는 않아 보였어. 봉사가 아니고선 힘든 일이지.’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건너다니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 ‘말은 들어주지 못해도 그녀의 손에 쥔 전단이라도 받아 줄 걸, 그랬다면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내 맘에 종이 한 장 정도의 온기나마 데울 수 있었을 텐데….’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것이 뭐든 간에 단 하나, 믿는 곳이 있다면 어떤 일에도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가능케 하고 죽음마저 기꺼이 내주고도 아깝지 않을 마음이 들게 하지 않을까.
설사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가졌다는 기억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종착역인 듯, 한 해의 끝에 서 있다. 십이월 삼십일일이며 마감이다. 종착역에 다다라 차에서 내릴 즈음이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두고 내린 것은 없는지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시라”
이맘때쯤이면 찾아가던 시골 할머니 집 겨울밤이 그립다. 이불 하나를 같이 덮고 사랑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날 새는 줄 몰랐던 그때, 그 아랫목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그리워진다.
추운 겨울을 데우는 건 결국 온기 뿐, 사랑이다. 꽃이 아님에도 꽃이 붙는 말처럼 눈꽃이 핀 겨울밤에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웃음꽃이 만발하게 피어오르던 그때가 몹시도 그립고 그립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세상의 일상은 여전히 무사하다. 그 무사함 안에 수없이 많은 각양각색의 스토리들이 들앉아 있다. 스토리는 길이며 삶이다.
한해의 끝에 서고 보니 후회와 반성이 번갈아 인다. 내 삶의 스토리는 어떻게 쓰고 채울 것이며 그 스토리의 마지막 날, 어떤 문장 부호를 찍을 것인가 생각해본다.
뭘 입어도 시리고 뭘 먹어도 허기가 진다. 어수선한 일상과 마음을 다잡고 앉아 지나온 길들과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내 머릿속을 관통하고 스쳐 간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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