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백정우의 줌인아웃]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 백정우
  • 승인 2023.01.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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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
영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스틸컷.

박찬욱 감독은 1992년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본다. 5년의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삼인조’ 역시 신통치 못했으나, 마침내 3번째 영화에서 기사회생 한다. 그 영화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운 ‘공동경비구역 JSA’다, 누군가 그에게 세 번째 영화마저 실패했다면 지금쯤 뭐하고 있을지를 물었을 때, 박찬욱은 말했다. “그럼 네 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겠죠”

세상은 불공평해서 나의 분투를 종종 실패로 보답한다. 이때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세상을 성토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즉 하면 된다가 아닌, 해도 안 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결코 포기하진 않는 사내들. 고봉수 사단으로 불리는 네 남자. 고봉수, 백승환, 김충길, 신민재가 그들이다. 고봉수 사단은 ‘델타 보이즈’와 ‘튼튼이의 모험’과 ‘다영씨’까지 함께 호흡을 맞추더니, 코로나시대를 기점으로 각자의 행보를 넓혔다. 신민재가 ‘귀여운 남자’로 다른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단독주연으로 나선 사이, 고봉수와 백승환은 ‘습도 다소 높음’을 내놓았고, 김충길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의 감독과 주연을 맡은 것이다.

‘습도 다소 높음’은 유명감독(의 영화)도 피해갈 수 없는 코로나시대의 극장 풍경을 블랙코미디로 버무린 영화다. 감염을 우려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극장주와 뒤통수만 나오는 동생의 영화를 봐야하는 형제와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에게 차인 배우가 뒤엉키며 영화 내내 웃음으로 이끈다. 결국 내 뜻대로 되는 세상은 없고, 누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이야기. ‘습도 다소 높음’의 엔딩은 백승환이 섀도복싱으로 원투 펀치를 날리는 장면이다. 제대로 된 훅 한 방 날리지 못한 채 원투만 뻗다가 끝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개의 인생이 그렇지 않느냐고 되 물으면서(…).

김충길의 감독 데뷔작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는 고봉수의 천연덕스러움과 홍상수의 일상성을 이종 교배시켰다. 영화 속 세상이 무명배우에게 허락한 건 동생에게 돈을 빌리는 것 정도다. 현실은 딱 거기까지다. 그의 연기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힘들게 꺼낸 고백은 좌절로 돌아오고, 어렵게 따낸 배역은 날아가기 직전이다. 체크카드 잔액부족으로 번번이 결재가 막힌다. 고봉수 영화의 인물들이 예의 그랬듯, 김충길도 대책 없는 낙관주의와 무분별한 모험정신을 앞세운다. 그리고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슬프거나 답답하기는커녕 영화를 보는 내내 같은 호흡으로 응원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같은 일은 반복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가 말하는 지점도 동일하다. 아님 말고, 안되면 말고. 삶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현실을 인정하고 또 다른 꿈을 품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것, 고봉수와 그의 친구들이 영화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일 테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다. 사소한 일들이 모여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시대로 인해 고봉수의 영화와 주류영화 간격이 조금은 좁혀지지 않았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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