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채 작가 첫 개인전…동제미술관 15일까지
정성채 작가 첫 개인전…동제미술관 15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1.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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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한 여정 거쳐 칠순에 ‘전업작가’
학창시절엔 그림대회 상복 터져
청년기 외시 합격·범어사 출가
영어교사·대기업 기획실 근무도
한의사 돼 인도·미주 원주민 봉사
“그림은 불안 극복 위한 동반자
두려움 엄습할 때 창조력 되찾아
작가 내면 반드시 그림 속 투영
색 사용 어눌하지만 오히려 순수”
정성채 작
정성채 작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익숙한 길을 선호하는 경로의존법칙을 따른다. 잘 아는 길이니 헤맬 이유도 없고, 심리적인 안정감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성채 작가는 익숙한 길보다 낯선 길에서 모종의 희열을 경험한다. 고요하던 마음에 파장이 일고,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오른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그에게는 두려움이기보다 적잖은 즐거움이고 자적(自適)이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없는 익숙한 길에서는 오감이 무뎌집니다. 하지만 낯선 길에서는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그 긴장감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단초가 되니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자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은 길을 많이 잃어 본 사람들이다. 낯선 길에서 목적지를 찾기 위해 새로운 길의 지형을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주변 정보를 새롭게 획득한 경험들이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길이든, 인생의 여정이든, 방황을 많이 해본 사람일수록 삶은 풍요로울 개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정성채 작가
정성채 작가

정성채의 인생 여정은 다사다난했다. 한 개인의 삶이 그 만큼 다채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가파른 산세들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수재 소리 들으며 성장했고, 청년기에는 영어로 특별외무고시에 합격하며 세상의 기대치에 부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 시대 상황에 밀려 공직의 길을 포기해야 했고, 그때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길이 그를 기다렸다. “성철과 법정 스님의 행적을 좇아 범어사로 출가했어요.”

출가자의 길도 그에게는 길게 허락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 속 수행자의 길로 돌아왔다. “눈앞의 살림이 제일가는 수행처”라는 자각의 결과였다. 이후 그는 10년간 북·중미의 원주민 의료봉사와 원주민 공동체의 땀집(sweat lodge) 의례를 비롯 수많은 영성 체험에 매진했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도 저마다 떨어지는 자리가 있다지만, 내가 아프니까 그만큼 더 맞바람을 향해 나아간 거 같아요.” 지난하게 그를 따라다녔던 불안이 그에게는 상처의 근원이었다.

영적인 갈증 못지않게 현실적인 움직임도 변화무쌍했다.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경제학도의 꿈을 키웠지만 여의치 않았고, 고교 영어교사와 그룹회사 기획실을 거치며 사회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1984년 동국대 한의대에 수석으로 편입해 한의사가 되면서 또 한 번의 인생역전을 경험했다. 그는 현재 한의사인 아내(이지향 대표원장)와 함께 동양당한의원(영남대 네거리)을 운영하고 있다.

평생 한 곳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에 희열을 느꼈던 그의 성정은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그는 칠순에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밀고 새로운 길 앞에 섰다. 동제미술관(가창면 헐티로 10길 18)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고 전업 작가를 선언한 것. “‘언젠가는 전시를 해야지’라는 생각은 했었는데 김길후 화가와 인연이 닿았으면서 첫 개인전을 열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가게 됐어요.”

늦어도 한 참 늦은 나이에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돌이켜보면 미술은 늘 그와 함께였다. 초등학교 때 미술은 즐거움의 도구였고, 그림대회에 출품한 작품들에 상복도 터졌다. 고교시절에는 작고한 양인옥 전 호남대총장이 서울대 미대 진학을 열성으로 권할 만큼 그의 미술적인 재능은 도드라졌다. 그의 첫 번째 그림 스승이었던 양 전 총장의 권유는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제게 허락된 길은 예술이 아닌 공부였고, 미대가 아닌 경제학과에 진학했어요.”

일흔의 나이에 전업작가를 선언한 결정적인 계기는 세무원 출신으로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던 화가 앙리 루소와 또 다른 화가 해리 리버만이었다. 특히 그는 단돈 6달러로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자수성가하고 77세에 은퇴한 뒤 뒤늦게 그림공부에 매진해 ‘미국의 샤갈’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리버만에 크게 고무됐다. “리버만은 101세에 첫 개인전을 열고 103세에 타계했어요. 불과 2분간 그의 삶을 라디오에서 듣고 전율을 느꼈던 게 그림에 몰두하게 된 첫 동기가 됐습니다.”

그가 미지의 길에서 모색의 정신을 밝힐 수 있었던 배경에 내재된 정서가 자리한다.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는 6·25전쟁 발발이후 휴전시기였던 1953년 여름에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과 사회적인 불안은 유년기 그의 정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년시절, 여덟 살의 누이 등에 업힌 채 논둑길옆 수로에 미끄러져 죽을 뻔한 사고 또한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근거가 됐다. “흙 범벅이 되어 집에 갔는데 제가 누나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어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정성채 작
정성채 작

 

그에게 그림은 ‘불안’과 ‘두려움’ 회복을 위한 여정에서 함께 한 동반자였다. 그의 인생역정을 기록하는 도구였고, 두려움 극복을 위한 매체였다. 동제미술관 전시에는 구상 작품 위주로 걸었지만 화풍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었다. 최근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반영하는 구상의 매력에 새삼 끌리고 있다. 그가 “구체적인 형상은 저의 반영이지만 작가와 감상자가 만나는 소통의 다리가 되는 것 같다”며 형상의 강점을 설명했다.

그림의 대상은 주로 풍경이나 인물이다. 일상이나 영적 공부를 위해 방문했던 여행지의 풍경이나 인물들을 드로잉과 사진으로 남기고,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옮겨 그린다. 일상이나 여행지 풍경들 중에서 그림의 소재로 채택되는 대상은 그의 심상(心想)과 불꽃이 튄 장면들이다. 그렇기에 채택된 대상의 단순한 재현보다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색채의 변조를 거치며 심상의 풍경에 근접해간다. 인물 또한 같은 과정을 거친다.

구상과 추상이라는 각기 다른 화풍을 병행하지만 외피보다 내면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엄격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형식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철저하게 내면에 기댄다”는 내용적인 동질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던졌다. “모든 그림은 화가의 자화상이자 자아상”이라고. “작가의 내면 즉, 영적인 상태는 그림 속에 반드시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적 상태의 시공간적 구현이라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단순 구상이나 인상을 넘어 표현주의적인 성향으로 흐른다.

구상으로 표현한 풍경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화면 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길’이 초현실의 세계로 이끄는 단초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색채 또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엿보게 하는 요소다. 그에게 색채는 감정을 표현하는 시각적인 매개 역할을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련미보다 어눌함에 가깝다. 바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이다.

그는 “색을 쓰는데 능수능란하지 않다”고 고백하면서도 “색에 능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전업 작가만큼 색을 만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 어눌함에서 오히려 의도치 않은 순수를 발견하고 수용합니다.”

수행을 할 때나, 의술을 행할 때나 미술은 늘 그와 함께였다. 수행 겸 봉사를 위해 인도 그리고 미주 원주민 거주 지역을 찾았을 때도 진료내용을 기록하고 원주민의 전통의식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활용했다. 전업 작가 못지않은 작업 활동은 한의사가 되면서 본격화됐다. 직업과 그림을 병행할 경우 그림이 직업에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만 그는 둘 사이의 줄다리기에 능했다. 비결은 ‘10분 작업’에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10분 화가’로 지칭했다.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시침을 하고, 환자가 침을 맞고 있는 10분간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10분 화가’로 표현한 것이다. 초기에는 10분이라는 진료와 미술의 병행은 미술의 입장에선 불리할 수 있다. 하나의 감정 상태를 계속해서 끌고 가기에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그는 감정 조절에 능수능란하다. “10분 화가가 이제는 저 만의 작업 패턴으로 자리를 잡아 집중도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의 시침 실력은 외국인에게까지 입소문이 날 정도다. 그림과 침술을 병행해도 진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그의 의술은 탄탄하다. 의술에서 내공이 쌓였기에 10분 화가가 가능했지만 가장 큰 지원자는 아내였다. “아내가 진료와 한의원 운영까지 많은 부분에 역할을 해 주고 있어 진료와 그림을 병행할 수 있었어요.”

그를 수행자나 한의사, 화가로 명료하게 구분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가 거쳐 왔던 여정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개인적인 삶의 다양한 이력들의 표출이 나의 그림”이라는 그의 말처럼 수행 중에 던졌던 영적 질문이나 깨달음의 조각들은 의술과 그림을 넘나들며 응축되어 나타난다.

무의식에 저장된 원초적인 불안을 관리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근기에 따라 극복하거나 아니면 함몰된다. 그의 경우는 흥미로웠다. 불안을 창조적인 삶의 원천으로 삼아 극복할 활로를 열었기 때문이다. 시기마다 새로운 곳에서 길을 찾았고, 그 길에서 만난 질문과 깨달음을 삶의 자양분으로 흡수했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그가 획득한 결실은 ‘평온’이었다.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는 창조적인 행위가 그를 평온으로 이끌었다. “막연한 두려움 혹은 결핍감이 엄습해올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내가 영혼임을 느끼게 되면 삶의 창조력을 되찾았고, 그림을 계속할 의지도 다지게 되었어요” 전시는 15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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