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모나, 양성훈 개인전 “미세한 백색 떨림으로 우리 민족의 恨 표현”
갤러리 모나, 양성훈 개인전 “미세한 백색 떨림으로 우리 민족의 恨 표현”
  • 황인옥
  • 승인 2023.01.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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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하거나 회색빛 띄거나…
농도·채도 조절로 다양한 흰색 표현
달항아리 전성기 조선 후기 철학 구현
과거와 현재·미래까지 잇는 역할 자처
작가 내면 투영시켜 다채로운 분위기
푸른색이 아름다운 청화백자도 선봬
양성훈 작
양성훈 작.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우리는 명품으로 추앙한다. 다양한 명품들 중에 백자 달항아리는 명품 중의 명품 반열에 올라 있다. 단순하게 ‘희다’, ‘둥글다’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심오한 미감을 백자 달항아리가 머금고 있다. 흰색이라고 하기엔 색감이 미묘하기 이를 데 없고, 원형이라고 하기엔 고졸한 맛이 가없다. 바로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다.

◇ 백자 달항아리에 응축된 한국인의 기운을 회화에 구현

가마에서 구워진 달항아리만 명품인 것은 아니다. 붓으로 표현한 회화 속 달항아리도 명품이 될 수 있다. 달항아리 고유의 소박하고 담백한 절제미를 끄집어 낼 수 있다면, 흙으로 빚어낸 달항아리나 붓으로 그린 달항아리나 명품인 것은 매한가지.

양성훈 작가가 달항아리에서 발견한 명품의 조건은 기운(氣運)이다. 달항아리의 백미인 무기교의 둥근 형태나 오묘한 흰빛 자체보다 형태와 색이 어우러져 잉태된 분위기, 즉 기운(氣運)을 표현하는데 온 몸을 불사른다. 백자 달항아리의 고졸하고 신비로운 기운은 한국인 특유의 기질로부터 말미암았다. 고졸한 형태에 담아낸 여유, 부정형의 정형이 전하는 소박한 품격, 모든 것을 품어 앉는 그윽한 순백 등 달항아리에 담아낸 한국미의 극치는 바로 한국인의 정서나 기질을 꼭 빼닮았다.

양성훈도 달항아리를 단순 기물 이상의 의미로 인식한다. 선조들이 백자 달항아리에 응축했던 내용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그것은 ‘한국성’이다. 그는 옛 도공들이 달항아리에 담아내려 했던 한국인 특유의 기운을 회화로 표현하는데 사활을 건다. “달항아리에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노력하죠.”

양성훈작청화백자-2
양성훈 작 청화 백자. 갤러리 모나 제공

◇ 미묘한 흰색으로 명품 백자 달항아리 근접

백자 달항아리는 표면의 흰빛이 백미다. 소박한 원형이 오묘한 흰빛과 만나 고졸한 품격을 잉태한다. 달항아리가 명품이 되기 위해선 형태도 형태지만 흰색 표현이 관건이다. 흙이나 불, 유약에 따라 흰색은 미세하게 달라진다. 눈처럼 희디 흰 ‘설백색(雪白色)’, 푸르스름한 ‘청백색’, 우윳빛깔의 ‘유백색’, 엷은 회색이 곁들여진 ‘회백색’ 등 그야말로 천자만별이다. 그 오묘한 색을 얻는 것이 도공의 역량이다.

회화에서도 “도자기 표면의 흰빛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에 따라 명작과 범작으로 갈린다. 그는 백자 달항아리를 가장 달항아리답게 이끄는 요소로 흰색에 주목한다. 백자 달항아리의 백미인 오묘한 흰빛을 확보하며 백자 달항아리의 무기교의 경지에 도달하려 한다. 특히 흰색의 농도나 채도를 조절하며 미세한 차이를 이끌어낸다.

최근 개막한 갤러리 모나 개인전에 걸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흰색에 진심인지를 짐작케 한다. 도자기 표면은 물론이고 여백마저 흰색 일변도다. 햇빛 보다 달빛 아래 매화가 더 강인해 보이는 것처럼, 달항아리도 흰색 여백과 어우러져야 제맛이 살아난다는 믿음으로 흰색 배경에 천착한다. “흰색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것만큼 가장 강렬하게 백자 달항아리의 정신세계를 돋보이게 하는 것도 없죠.”

그는 백자 달항아리를 단순 기물 이상으로 인식한다. 그에게는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관장하는 우주다. 형태보다 흰색에 집중하는 이유도 정신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가 “회화 속 달항아리는 한민족의 정신을 담는 기물”이라고 언급했다. “백색의 미세한 떨림들을 통해 한민족 특유의 기질인 정과 한의 정서를 표현하려 합니다.”

달항아리의 표면과 여백이 모두 흰색일 경우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냐?”가 관건이다. 그는 느슨한 방식을 택한다. 둘 사이의 경계를 명확화 하지 않음으로써, 달항아리 내면의 영토 확장을 꾀한다. “달항아리의 세계가 여백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개연성을 동일한 계열의 색채 처리로 획득하게 됩니다.”

◇ 실물보다 작가가 재해석한 백자 달항아리 표현

그의 달항아리는 재현과 거리가 있다. 미술관 등에서 달항아리를 그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서 다양한 달항아리 이미지를 찾는 과정을 거치지만, 모두 참고용일 뿐이다. 막상 캔버스 앞에 앉으면 달항아리와 대면했던 첫 순간의 느낌에 집중한다. “철저하게 작가인 제가 재해석한 달항아리만 추구해요.”

“문양이나 그림자까지 배제하고 오직 흰빛에 집중”하는 태도는 그의 백자 달항아리들이 동일한 조건 하에 있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이 경우 “각각의 작품이 가지는 개별성을 어디서 확보해야 하는지?”가 과제가 된다. 그는 정곡법을 구사한다. 색을 승부처로 둔 만큼 개별성 또한 색으로 해결하려 한다. “흰색의 미세한 차이로 개별성을 확보합니다.” 이때 새롭게 부각되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 자신이다. 어차피 색을 쓰는 주체가 작가이고, 붓 터치 중에 그의 내면 상태가 자연스럽게 달항아리에 이입되는 과정에서 작품마다 차별성이 확보되어 갈 수 밖에 없다.

“달항아리에 응축된 한국인의 기질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저의 내면상태가 만나면서 분위기가 제각기 다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한국인 특유의 기질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세상의 변화에 편승한다.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완고하던 기질에 미세한 균열이 찾아든다. 하지만 작가가 백자 달항아리에 녹여내려는 핵심은 변하지 않는 원형이다.

그가 원형의 기질을 발견하는 곳은 전성기의 백자 달항아리다. 그는 전성기였던 조선 후기의 도공들이 백자 달항아리에 담아내려 했던 당대의 정신과 철학을 회화로 환원한다. “저의 회화에선 현대적인 백자 달항아리는 배제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질이 변화되었기 때문이죠.”

시간을 거슬러 달항아리의 본원으로 거슬러가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른다. 달항아리의 본원과 작가가 살고 있는 시기의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녹여낸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추가하게 된다. 달항아리의 전성기였던 조선시대와 그가 살고 있는 21세기 사이의 간극을 ‘시간성’이라는 개념으로 해결한다.

시간적인 간극은 흰색의 중첩과 빛바랜 흔적들로 노련하게 서술한다. 빛바랜 달항아리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가 던졌던 질문인 “존재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서술을 깊고 그윽한 흰빛으로 해결하는 것. “시간의 흔적들이 녹아있는 백자 달항아리의 표면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발견합니다. 저의 회화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인간의 삶, 시간의 연결성조선 백자 달항아리에 표현합니다.”

그의 작업에서 난맥상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 10~20회 젯소를 사포로 닦은 후 색을 얇게 수차례에 걸쳐 올리면서 형태를 잡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세월이 만든 상처나 흔적들도 함께 입혀진다. 중첩된 색들의 총합으로 마침내 시간을 머금은 신비한 달항아리가 빛을 발하게 된다. 색이 중첩될수록 작업을 시작할 때의 화려한 기교는 사라지고 소박한 가운데 강단 있는 한국인의 정서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부분적인 수정을 가할 경우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

“흰색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작업 특성상, 아주 작은 차이에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면 아예 다시 그립니다.”

◇ 백자 달항아리 통해 시간성과 역사성 서술

백자 달항아리를 그린 것은 2011년부터다. 추상적인 화풍에 꽃이나 도자기 등의 소품을 공중을 부유하는 형식으로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백자 달항아리로 소재를 단순화했다. “대학 다닐 때 정물화 소품으로 그릇이나 토기를 사 모았어요. 그것이 추상 작업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다 10여년 전부터 주연으로 삼았죠.”

화풍을 하루아침에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도 변화가 쉬웠던 것은 아니다. 추상 작품들이 곧잘 판매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당시 “작가가 화풍을 바꾸는 것은 죽음과 같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변화에 대한 용기를 준 이는 그의 스승인 고 정점식 선생이었다. “작가는 작업의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정점식 교수님의 가르침에 용기를 냈던 것 같아요.”

추상적인 표현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변화하면서 주제의식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한국인의 기질’과 ‘시간성’이라는 개념들이 백자 달항아리의 담백한 형상에서 빛을 발해갔다. 자신을 비우고 덜어낸 결과다. 작업 초기엔 사실적인 달항아리를 추구했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로 변화했다. “시간을 켜켜이 머금은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오묘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세계죠. 그 오묘함을 몽환의 흰색으로 표현했어요.”

갤러리 모나 전시에는 달항아리와 함께 다완 작품과 청화백자 문양을 그린 작품도 걸렸다. 백자 달항아리와 달리 다완은 속이 비어있어 그 맛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붓질은 더 작아지고 손맛도 더 많이 개입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청화백자 문양은 흰색만 쓰는 작업이 주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흰색 작업만 하니 눈에 초점이 흐려졌어요. 청색 문양은 색에 대한 갈증도 해소하고,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강도를 완화하기 위해 더러 그리고 있습니다.” 양성훈 갤러리 모나 개인전은 3월 11일까지.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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