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담배나 끊을까?
[백정우의 줌인아웃] 담배나 끊을까?
  • 백정우
  • 승인 2023.02.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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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유령
영화 '유령'스틸컷

군대 시절부터 피우던 담배를 끊은 건 200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남들처럼 건강에 이상신호가 감지돼서도 아니고, 새해 결심으로 실행한 일도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집은 손에서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순간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까지 하루 1갑이 모자란 헤비스모커였다. 내 금연엔 조건도 칭찬도 없었다. 프리랜서 주제에 기업에서나 줄 법한 금연장려금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농담처럼 거짓말처럼 담배를 끊었다. 한 순간 단 한 번의 결심으로.

“나라를 찾으면 담배나 끊을까?”

2009년 진국부 감독의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를 리메이크한 이해영 감독 ‘유령’의 엔딩 시퀀스. 이하늬와 박소담이 등을 보이고 앉았다. 흑색단 대원 시신을 수습하고 담배를 피우며 넋두리처럼 푸념처럼 하소연을 나눈다. 창밖에는 빗물이 흐르고 알전구 빛이 알록달록 빛난다.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방금 전까지 사선을 함께 넘었던 두 사람이다. 조국광복 기념으로 담배를 끊겠다니. 비관적 허무주의의 발로였을까?

둘은 영화 내내 틈만 나면 담배를 피우던 인물이었다. 그만 죽자고 탄식한 그녀였다. 너무 많이 죽었다고, 이젠 그만 죽자고 호소한 ‘유령’이 영화 엔딩에서 담배를 끊겠다는 말. 뜬금없는 쇼트다. 나는 이 쇼트에서 미소를 지었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유령’은 각종 클리셰가 잡종교배 된 빤한 영화다. 시종일관 양손에 떡을 쥐고는 우왕좌왕의 연속이었다. 원작 ‘바람의 소리’가 폐쇄공간에 갇힌 항일 공산당원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태도와 심리를 긴장감 넘치게 재현한 반면, ‘유령’은 스릴러로 시작해 액션으로 끝나는 괴이한 영화였다. 리메이크가 아니라 모티브를 가져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무차별 총격전과 아수라장의 결과는 일본군 몰살이다. 총독취임식장 시퀀스는 워낙 많은 사상자를 낸 살육전이었고, 이미 호텔에서도 숱하게 죽이고 탈출한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았다고 느긋하게 와인과 정찬을 누릴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고작 해야 담배 한 개비겠지. 총알 장전하는 동안 담배 한 개비 물고 한숨 돌릴 수 있는 그 순간은 얼마나 값진 것이었을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전쟁을 기록한 사진에 어김없이 보이는 것은 막간의 휴식을 즐기는 병사들 손에 들린 담배이다. 혹은 비밀결사가 모이는 지하 술집에 자욱한 담배연기는 꽤나 멋진 미장센이다. 솜 강 전투에서도, 스페인 내전에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담배는 죽음 다음으로 병사와 가까웠다. 숨 막히는 긴장 끝에 찾아온 휴식. 한 개비 담배 연기에 고향과 연인과 부모형제가 지나가고 이어질 전투에 대한 불안이 씻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던질 농담으로, 담배 한 개비 정도는 괜찮지 않나?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녀들이 담배를 끊으려면 나라를 되찾아야 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은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황금관 영사기사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해방된 조국 땅에서 피우는 담배 맛.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인즉. 그러니 담배를 끊기는 왜 끊나.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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