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빌론'...할리우드, 지긋지긋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영화 '바빌론'...할리우드, 지긋지긋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 김민주
  • 승인 2023.02.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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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영화로 바뀌던 격동의 시기
꿈 쟁취 위한 다양한 인간 군상
번성했지만 타락한 바빌론 비유
재즈로 꿈 이야기한 ‘라라랜드’
이번엔 영화로 삶과 예술 논해
OST 맛집으로 부족함 없어
영화-바빌론3
영화 ‘바빌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편의 영화에는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담겨 있다. 지금 이 순간 스크린에 걸린 영화들은 따지고 보면 지난 130여 년간 영화인의 성공과 실패로 얻은 노하우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다. 이젠 대중문화가 된 ‘영화’. 과연 주류 매체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어땠을까?

할리우드 큰손 돈 월락의 대규모 파티에 무성(無聲)영화 최고의 스타인 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등장하자 파티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진다. 잭에게 열광하는 사람들 속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와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도 있다.

무명 배우 넬리는 빈털터리지만 스스로를 타고난 스타로 여기며 반드시 영화배우로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 확신하는 야심가다. 멕시코 출신으로 파티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웨이터 매니는 성공에 대한 열망을 가득 품은 청년이다. 매니는 파티장에서 만난 넬리에게 반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인 듯 우정인 듯한 감정이 피어난다.

두 사람 모두 파티 이후 운 좋게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를 잡는다. 넬리는 어느 영화 속 천박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고, 매니는 잭의 눈에 들어 영화 촬영 스튜디오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할리우드의 영화 촬영장의 시스템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무성영화의 시기라 촬영장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하며, 대사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배우들은 약이나 술에 늘 취해 있으며, 카메라는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한쪽에서는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스태프들의 시위가 한창이며, 촬영장에는 제대로 된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아 죽거나 부상을 입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카메라를 둘러싼 상황은 난리 통이지만, 결국 카메라 안에서 완성된 작품은 아름답기만 하다. 흑백의 무성영화 속 해가 진 노을을 배경으로 연출된 남녀 배우의 키스신, 눈물을 흘리는 여배우의 순수하고 매혹적인 클로즈업 쇼트는 뭉클한 정도로 눈부시다.

영화 ‘바빌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바빌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사막에 세트를 짓고 직접 쓴 자막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던 무성영화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소리를 함께 들려주는 유성영화로 영화산업은 변화한다. 배우는 이제 관객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뛰어난 외모뿐만 아니라 좋은 목소리와 발음을 구사할 수 있어야만 했다. 매니는 넬리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도 영화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지만 좀처럼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

영화 ‘바빌론’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 할리우드에서 영화에 인생을 전부 불사른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라라랜드’, ‘위플래쉬’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온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계를 사치와 향락으로 악명 높았던,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고대 도시 ‘바빌론’에 비유해 영화를 그렸다.

사실 영화 ‘바빌론’은 ‘라라랜드’와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라라랜드’에서 재즈를 통해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꿈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감독은 동일한 주제를 새롭게 변주해 선보였다. 소재는 재즈에서 영화로 바뀌었으나 다시 한번 꿈과 사랑, 삶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며 한층 더 강화하고 확장된 주제 의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만 1930년대 LA란 시공간이 한국 관객에겐 다소 멀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할리우드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과 이해도가 영화를 얼마만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정보를 하나씩 차례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관객들의 호흡과 달리 영화는 이미 아는 걸 전제로 끌고 가는 호흡이라 서로 어긋나는 지점이 많다. 하지만 ‘바빌론’의 감독은 데이미언 셔젤이 아니던가. 어려운 영화를 가깝게 끌어당길 수 있도록 만드는 건 단연 ‘음악’이다.

심장을 울리는 재즈,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대신하는 현악 연주 등 다양한 음악들이 영화 곳곳을 채우며 감수성을 끝까지 끌어올린다. 매력적인 음악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바빌론’을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음악을 쓴 것 같지 않다. 음악에서 이야기가 탄생한 느낌이다.

가열차게 끓어오르는 서사가 아니지만, 18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속에서 흡인력을 높이는 건 배우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넬리 역의 마고 로비가 인상적이다. 배우 지망생부터 커리어 정점을 찍고 추락하기까지 심리를 익살스러운 표정과 어조, 생동감 넘치는 액션으로 완벽하게 그려내며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완성했다.

영화의 메커니즘 자체를 다룬 ‘바빌론’에서 셔젤 감독은 ‘영화’ 자체를 추악하고 싸구려로 보는 동시에 애정과 존경의 시선으로 칭송했다. 이 지점이 그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사실 ‘바빌론’은 셔젤의 할리우드와 영화에 대한 ‘가시 돋친 찬가’를 담은 러브레터다.

점진적인 상승곡선을 그리는 스토리와 뚜렷한 파국의 결말이라는 고전적 영화 문법까지 정확히 적용하고 있는 ‘바빌론’.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통상적인 영화 관객에겐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영화인이거나 그에 못지않게 영화를 사랑하는 애호가에겐 오히려 짧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김민주기자 kmj@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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