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는 달구벌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봤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는 달구벌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봤다
  • 김종현
  • 승인 2023.02.0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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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지창조의 대서사시가 금호강물이 되어 흘렀다
인간은 갈대밭에서 시 짓고 노래 해
갈대피리 기반 색소폰 등 악기 만들어
금호 ‘물을 얻으면 승천할 금호잠용’
선인들 ‘언젠가 이름값 할 것’ 믿어
선비들도 강물에 비친 달 보며 노래
갈대피리
태초에 인간이 음악의 도구로 선택한 갈대피리

◇갈대풀피리(갈대피리) 소리에 물결이 춤추는 금호강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초에 예술은 갈대밭에서 새들 소리를 듣고 인간은 시를 짓고 노래를 했다고 한다.

“바람소리 결 흥에 취한 새들도 노래하는데 갈대인들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갈대밭에 인간인들 갈대라도 꺾어서 피리를 불었노라(Birds intoxicated with the sound of the wind sing, but can the reeds stay still? In the reed field, humans broke even reeds and blew the flute).”

이렇게 갈대피리(葦笛, reed-flute)가 탄생되었고 갈대피리를 기반으로 서양에선 클라리넷, 색소폰, 오보에, 바순, 백파이프, 목관악기용 리드(reed)가 만들어졌다. 갈대피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기의 시작점이 되었다. 매년 연말에 듣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Nutcracker)’의 ‘갈잎피리(내시피리 혹은 양파피리)의 춤(Danse des Mirlitons)’을 이끄는 갈대피리의 앙상블을 들었을 때 더욱 신묘함을 자아내었다. 마치 금호강변에서 가을갈대 스치는 소리를 닮아있었다.

금호에 살았던 선인들을 생각하면, 기원전 3천년경에 수메르인들은 걸쭉한 맥주를 거르지 않고 갈대빨대로 빨아 마셨다. 오늘날 대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BC 2만5천년 이전 고대 아시리아 부조엔 병정들이 잠수함처럼 양가죽 배를 타고 바다 속으로 잠수할 때는 갈대로 숨을 쉬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고대 이집트 나일 강 섶에 사던 사람들은 갈대 뗏목 배를 이용해 고기잡이를 했으며, 오늘날도 폴리네시아, 칠레 등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1천440년 경 이슬라엘 지도자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민족대이동을 위해 인도했던 갈대바다(蘆海, Reed Sea, Yam Suph)를 후세 사경작업(寫經作業)을 하던 수도사들이 갈대(reed)에서 이(e)를 빼먹는 바람에 오늘날 홍해(Red Sea)로 만들어 버렸다. 갈대바다(Yam Suph)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20회 이상 나오며, 1611년 킹 제임스 성경(Authorized King James Version of the Christian Bible) 이후 갑자기 홍해(紅海, Red sea)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갈대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19 군데나 된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추린다면, “습지가 아니고서 파피루스 갈대가 자랄 수 있겠는가? 물 없이 꼴풀들이 자랄 수 있겠는가?”, “불에 탄 땅이어야 물웅덩이가 생기고, 메마른 땅이어야 샘물을 솟아오르게 하며, 자칼의 은신처에서는 짓이겨진 풀들이 갈대와 꼴풀이 된다.”, “너희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냐?”, “내가 택하는 이 같은 금식, 사람이 자기를 겸비하게 하는 날이냐. 갈대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이냐?” 그리고 마지막 연약한 갈대이지만 희생의 가치가 있다면 “연꽃 아래 깔려있는 갈대는 은밀히도 늪에 눕도다.”

잘랄알딘 루미(Jalal Al-Din Rumi)의 ‘갈대피리의 노래’의 몇 구절이 회상되어 여기에 적어본다면, “몸은 영혼으로부터 숨겨져 있지 않고, 영혼은 또한 몸으로부터 숨겨져 있지 않건만,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영혼이란 것을 본 적이 없다네.”, “이 갈대피리의 이 구슬픈 소리는 단순한 공기떨림이 아닌 불이라네. 이 불이 없는 자는 죽은 것으로 여겨지리라!”, “그 누가 이 피리 같이 독물이고 해독제를 봤던가? 누가 이 피리처럼 동정심 많은 위로하는 사람을 봤는가?” 오늘날에도 페루 푸노 안데스 산 4,000m/sl 산정호수 티티카카에선 갈대 순을 먹는 건 물론이고, 집도 학교도 온통 갈대로 만들고 살아간다. 이런 갈대 밭 대자연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갈잎의 노래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혼연히 떠나버리는 영혼마저도 떠날 때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팔공·비슬 두 손으로 보담은 금호강물

달구벌 분지를 한 폭의 동양화처럼 스케치한 표현으로는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대구는 경상감영이 있는 곳으로, 산이 사방으로 높게 둘러 싼(山四方高塞), 그 항아리 가운데에 펼쳐지고 있다(在其盆中散). 그 가운데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있다(其中琴湖東西流入洛東). 관아(慶尙監營)는 금호강 뒤쪽에 있고, 경상도의 한 복판에 위치한 셈이다. 남북으로 가로(街路, 골목)가 나있으며, 산세와 물길이 좋아 도회지가 형성되었음.” 금호는 달구벌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만 봤다.

이곳을 살았던 선인들은 금호를 두고 ‘물을 얻으면 승천할 금호잠용(得水昇天之琴湖潛龍)’이라고 믿었다. 마치 삼국지에서 후한헌제 건안 때에 백성들 사이에 떠돌아 다녔던 민요 “89년간 국운쇠망이 시작하자, 13년간에 혼자조차도 남지 않게 되었다네. 마침내 천명을 다해 하늘로 사라져야 할 경각에 처해있으니, 진흙 속에서 숨어있던 잠용들이 못에서만 머물지 않고 하늘 위를 향해 날아오르고자 한다네(八九年間始欲衰, 至十三年無孑遺. 到頭天命有所歸處, 泥中蟠龍向天飛).” 처럼 언젠가 금호란 이름값을 할 것을 믿어왔다.

금호 섶 와룡산 기슭 대로원(大魯院, 신라어 따로원)에선 신라 화랑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벼슬길 가는 선비들까지도 금호 강물에 비친 달, 건너편 푸른 하늘을 보고 “세속을 초달한 흥취를 한곳에 품었으니 장쾌한 호연지기로세. 푸른 저 하늘에 올라 밝은 달을 손에 움켜쥐고 싶다네. 칼을 뽑아 물을 갈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잔을 들어 근심을 삭혀보고자 했으나 걱정만 깊어지네. 한평생 사는 게 이다지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엔 머리를 풀고 조각배나 저어가겠노라.”라고 했던 이백처럼 노래했다.

신라 꽃 사내(花郞)들이 중악(中嶽, 公山)과 금호강변 와룡산록 대호원(臥龍山麓大魯院)을 오가면서 “어진 사람의 요산과 지혜로운 사람의 요수” 도야로 호연지기를 함양했다.

중악을 선인들이 선호했던 이유는 “바다용궁에서 삼천 척이나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中嶽上天許三千尺)”는 사실에서 금호용궁(琴湖龍宮)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진골 출신 김유신이 15세 때(610년) 중악금호도야(中嶽琴湖陶冶)를 마치고, 17세 때 비로소 신라국가 처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은 늘 호랑이나 승냥이처럼 신라를 침범하는 걸 보니 격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어느 날 공산석굴에서 신에게 맹세를 했다. “한낱 미미한 신하이지만 재능과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고자 뜻을 세웠습니다. 오직 하늘께서 굽이 살피시어 제게 도움을 주세요(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 김춘추도 같은 중악금호도량에서 심신수련과 호연지기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함양했다.

그런데 김유신이 47세 때 중악 인근 압량주 군주로 642년에 임명되어 내려왔다. 마침 이 때에 김춘추는 39세였는데, 대야성 도독이던 김품석이란 사위가 백제 윤충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자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은 ‘두 명의 지아비를 섬기지 않겠다(不更二夫).’고 자결했다. 이런 참사로 충격을 받았던 춘추공은 사위와 딸의 원함을 갚고자 “백제를 통째로 씹어 삼키지 못한다면 어찌 사내라고 하겠나(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라는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선덕여왕도 하도 막무가내(莫無可奈)라서 고구려 청병사신으로 그를 윤허했다. 국가사신으로 간지 몇 개월이 지나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비밀첩보가 도착했다. 곧바로 김유신은 일만 병사를 몰아 한강을 지나 고구려 남쪽국경에 당도할 때. 마침 김춘추가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그때의 구사일생 지혜가 바로 ‘토끼선생 간땡이(兎先生之肝)’에서 나왔다. 지난날 화랑시절에 금호강에서 수전훈련을 했을 때 강물에 빠진 옷가지를 ‘금호강 섶 바위’위에다가 늘어 말리면서 “이건 토끼간이다”라는 농담을 했던 일화를 회상했다. 토끼의 지혜로 결국은 통쾌하게 고구려 놈들의 뒤통수를 내리친 것이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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