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라시대 화랑도들에 숙식 제공하던 ‘노원’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라시대 화랑도들에 숙식 제공하던 ‘노원’
  • 김종현
  • 승인 2023.02.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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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원에서 화랑도의 요수호연(樂水浩然) 도야
옥황상제, 선녀 시켜 금호강 물 퍼 올려
선녀가 끈 놓쳐 물바가지 땅에 뒤집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산이 ‘함지산’
두레박을 방티라 해 ‘방티산’으로도
경산 출신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
두 스님, 포산에 숨어 수도하고 계셔
관기성사는 남쪽·도성성사는 북쪽에
당시 시골사람들이 ‘소슬산’이라고 해
금호강두레박
금호강에서 물을 푸던 선녀의 두레박을 상상해 본다. 그림 이대영

◇용궁(龍宮)에서 치솟은 달구벌이라니?

2022년 연말을 앞두고 미뤄왔던 오늘날 서구 원대동(院垈洞)에 있었던 신라시대 화랑도 숙소시설 대노원(大魯院) 혹은 노원(魯院)에서 조선시대 땐 역원으로 이용했던 와룡산록대로원(臥龍山麓大櫓院)에 대해 알아보고자, i) 갓바위 부처(冠巖石佛)를 8년간 망치질로 만들었던 의현(義玄, 원광법사의 수제자)선사가 수도했던 선본사(禪本寺) 사적을 찾아보고, ii) 신라시대 경주 선방골 선방사(禪房寺)에서 발견된 대로원(大魯源) 기명와편(記名瓦片)과의 관련성을 더듬고자, iii) 오늘날 관암사(冠巖寺)에서 직선거리 200~300m 관암석불까지의 큰 바위돌(巨礫, boulder)들이 흘러 내린 너덜겅(great-stone river)를 따라 올라갔다.

관봉 정상(850m/sl)에 치솟았던 화강암으로 부처를 새겼다는 사실(毘盧峰 1,193m/SL 가운데 968m나 융기)을 확인했다. 이렇게 된 연유는 중생대 지질형성 과정에서 경상누층군(慶尙累層群)을 화강암이 얇은 땅거죽을 뚫고 솟아올랐기(貫入)에 달구벌의 대부분 산(비슬산, 대덕산, 가산 등)들이 이때에 치솟았다.

가장 손쉽게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함지산 망일봉(咸池山 望日峰, 273.6m/SL)인데 산에 오르면 조개껍데기와 바다바둑돌(몽돌)이 가는 길마다 발에 차인다. 함지산(咸池山)이란 고대천문학에서 ‘해지는 서녘에 있는 천왕의 쌀 창고(西王之庫)’라는 의미에서 함지(咸池)라고 했다.

고산자(古山子)의 지인이었던 신헌(申櫶, 1810~1884)은 자신의 금당초고(琴堂初稿)에서 옥황상제가 금호용왕(琴湖龍王)도 모르게 선녀들을 시켜 금호강물을 심야에 퍼 올렸다. 어느 날 선녀가 금호강 별빛의 황홀함(琴湖星流極惚)에 빠져 두레박(함지박 혹은 물바가지) 끈을 놓치는 바람에 물바가지는 땅에 떨어져 뒤집혀 엎어졌다. 그렇게 된 산이 바로 함지산(函之山, 函芝山)이었다.

지역주민들은 모난 두레박(물바가지)을 방통이 혹은 방동이(方桶伊) 혹은 방티(方地)라고 한데서 방티산(方桶伊山, 方地山)이라고 했다. 이런 사연을 들었던 고산 김정호(孤山 金正浩, 1804~1866)는 금호강물을 퍼 올리다가 두레박(well bucket) 줄을 놓쳤던 선녀가 속죄(贖罪)로 팔공산이란 8형제를 낳았지만 늙어서 금호강물 섶에 쪼그리고 앉아 옛날 일을 그리워하는 홀어머니 산(獨母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861년도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목판본에다가 독모산(獨母山)이라고 새겼다. 또한 앞산(大德山)은 물론이고, 비슬산(琵瑟山) 대견봉(大見峰, 1,084m/SL)도 해발 1,000m에 있는 대견사(大見寺)에서부터 흘러 내린 너덜겅 혹은 암괴류(stone rive)가 폭 5m, 길이 1.4 km(휴양림과 하천개수공사까지 2㎞)나 이어지고 있음은 융기했다는 단서다. 1960년대 항공사진(혹은 위성사진)을 통해서 볼 때 1천m 정도 융기(隆起)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때 경산(慶山, 獐山) 출생 일연(一然, 1206~1286, 속명 全見明) 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시대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분의 신성한 스님이 아무도 알 수 없는 포산(包山)에 숨어서 수도하고 계셨는데, 관기성사(觀機聖師)는 남쪽 고개에, 도성성사(道成聖師)는 북쪽 동굴에서 지냈다.”이라는 기록이 있다.

포산은 당시 시골사람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고 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 어(Sanskrit語)로 감싸 안다(包)라는 뜻이라 포산(包山, 혹은 苞山)이라고도 했다. 포산(包山)은 중국식 발음으로 ‘빠오산’, 중국한자로 ‘불산(佛山)’이다. 한편으로 신라어 소슬(所瑟, soseul)의 어근을 오늘날에 살려보면, i) 소슬바람과 같은 ‘소슬(蕭瑟)하다’ 혹은 ii) 소슬(솟을)대문에 같이 ‘솟아오르다(兀騰)’로 양분된다.

조선시대부터 비슬산(琵瑟山)이라고 했는데 신라 때 ‘소슬산(所瑟山)’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직 중국악기인 ‘비파(琵琶)’를 강조한 중국사대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말 어근 ‘비슬거리다’라는 의미가 아닌 인도의 ‘비슈누 여신(Goddess Vishnu)’의 비슈누(Vishnu, 毗瑟怒天) 소리와 ‘비슬(琵瑟, Visheul)’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표시했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비슬산(毗瑟山)’,‘비슬산(琵瑟山)’,‘비슬산(枇瑟山)’ 혹은 소슬산(所瑟山) 등으로 사용해 왔다.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성주출신 이숭인(李崇仁, 1347~1392, 號 陶隱) 선생은 젊었을 때 과거 혹은 학문도야를 위해 비슬산(毗瑟山) 산사에서 젊은 스님들과 불경에 대해 갑론을박을 많이 했다.

당시 이야기를 도은집(陶隱集) ‘인흥사 시제를 의뢰받아(寄題仁興社)’에서 “인흥사는 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네, 지난날 총각스님과 노닥거리고 있을 땐 반딧불과도 친구했었지. 신도님들(檀越)이 때때로 찾아와서 예불을 드렸지. 총각스님들(Acarya)과 대낮에도 불경을 논하는 자리까지 마련했었다지. 그 뜰엔 불탑 하나가 하얗고 우뚝하게 솟아 섰었지. 깊 섶 큰 소나무들은 모두가 짙푸른 빛깔 일색이었지. 가장 잊지 못하는 건 천정에 쓴 황금색 글씨인데, 마침 지금도 휘황한 빛남은 화려한 별빛처럼 쏟아졌다네.”라고 적고 있다.

또한 ‘비슬산 승사를 제목으로(題毗瑟山僧舍)’라는 시에선 “속세 나그네가 말을 몰아 동쪽 길로 가니, 노승(老僧)은 작은 정자에 누워 있네. 구름은 해를 쫓아 온종일 희기만 한데, 산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늘 푸르기만 하네. 솔방울 벗을 삼아 지난 일 까마득했네. 말 몰아 구경하니 산신령님께 뵐 낯이 없어라. 바라는 게 있다면 비슬산 골짜기 물이나 길어다가 이곳 산삼과 복령일랑 한 움큼 집어넣어 푹~달여 마셔나 볼까?”라고 적었다.

도은 선생의 글로는 ‘동문선(東文選)’에 나오는 ‘명호도(鳴呼島)’ 즉 한 고조(漢高祖)에게 신하됨을 거부하고 500인의 빈객과 같이 자결했던 전횡(田橫)의 고사를 소재로 쓴 시문이다. 기억나는 구절은 마지막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경박한 소인배들이 아침엔 친구였다가 저녁엔 원수가 되는 걸(君不見, 古今多少輕薄兒, 朝爲同袍暮仇敵).”

◇화랑도 수련시설(臥龍大魯院)이 노원동(魯院洞)에 있었다고요?

대구시 서구 원대동(院垈洞)의 동명유래를 살펴보면 “신라시대에 화랑도들이 심신단련을 위하여 전국 명소를 찾아다닐 때,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만든 곳을 원(院) 또는 노원(魯院)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시대 때 이곳에 대로원(大櫓院)이 있었다고 하여 그 터(垈地)를 원대(院垈)라고 하였고, 오늘날 이 지역에 원대동(院垈洞)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대구의 많은 향토사학자들은 조선시대 역원제도의 하나였던 대로원(大櫓院)으로만 인식한다. 특히,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달성십영(達城十詠) 가운데 ‘노원송객(魯院送客)’을 모른다면 대구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원은 조선역원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향토전문가들이 노원(魯院)의 위치를 i) 현재 북구 행정동 노원동(魯院洞)과 노원송객(魯院送客)의 노원(魯院)이란 한자가 맞아떨어지고 있는 점. ii) 1975년 북구청 신설에 따른 행정동 분할작업을 할 때에도 노원이 있었던 곳이기에 노원동(魯院洞)으로 작명했다고 믿고 있다. iii) 조선시대 팔달나루터(현 노곡동 부엉덤이) 바로 건너편 뱃길 최단거리, 현 여성회관에 노원이 있었다고 노원의 터(院垈) 위치를 근거도 없이 단지 도상거리(圖上距離)만으로 비정했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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