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열 여덟, 출근 138일 만에 세상을 등졌다
다음 소희...열 여덟, 출근 138일 만에 세상을 등졌다
  • 김민주
  • 승인 2023.02.1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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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콜센터 실습 첫 날
고객 성희롱·폭언에 넋 나가
동료에 담임까지 ‘나몰라라’
계약과 다른 월급에 실적 강요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
‘도희야’ 감독 “한국 병폐 고발”
사회 안 바뀌면 다음 소희 ‘또’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다음 소희는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 배우 배두나, 김시은은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소희는 대체 누구였기에.

춤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희(김시은)는 담임의 권유로 대기업 통신회사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다. 소희의 전공인 ‘애견 동물 관리’와 다소 동떨어진 직무지만 취업이 된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들어간 회사의 첫 출근 날, 소희는 고객에게 성희롱과 폭언을 듣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하지만 주위의 동료들은 소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이어나간다. 소희가 근무하는 부서는 ‘세이브(SAVE)’팀. 해지방어팀으로 불리는 이 부서는 해지를 원하는 고객들에게 위약금을 강조하며 혜택을 제시하고 인터넷 유료방송 등 다른 상품을 팔아야 하는 일명 ‘욕받이’ 부서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심해 다들 꺼리는 곳이다.

언제나 밝고 당당하게 살던 소희는 비윤리적 행태가 난무하는 회사에서 점차 메말라간다. 고객들의 도가 넘는 언어폭력은 견디기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보단 오직 성과와 실적에만 목숨 거는 회사는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계약서에 적힌 것보다 적은 월급을 준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에 묵묵부답인 담임선생님과 가족, 고민 한번 들어주지 못하는 친구들까지 더해져 소희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는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1068화에 방영된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2017년 1월, 특성화고 학생 홍수연 양은 전북 전주의 한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통신회사 고객센터로 출근한 지 138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아동학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도희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정주리 감독은 ‘다음 소희’를 통해 또 한 번 청소년 문제를 시사했다. 오직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열악한 환경으로 학생들을 보내는 학교, 실습생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업, 예산 삭감이 두려운 교육청까지. 영화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은 콜센터를 통해 실적 위주 가치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질적인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

영화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소희와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는 형사 유진(배두나)이 극을 끌고 간다. 1부에선 소희가 주축이 되어 죽음으로 내몰리기까지 과정을 다룬다면 2부는 형사 유진이 중심이 되어 소희를 죽음으로 내몬 존재는 과연 누구였는지 관객이 성찰하도록 이끈다.

둘은 아주 짧은 찰나 동안만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그 사실은 이미 서로가 확인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서로를 인지하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함께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에서 흘러가는 두 개의 시간성은 정주리 감독이 선택한 수사적 장치로 보인다. 형사 유진의 지연된 등장을 마주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이미 늦음’이 비로소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소희의 행적을 추적하는 유진은 형사라기보단 기자나 PD에 가깝다. 소희의 담임선생님과 콜센터 관계자들 등을 향해 조목조목 그들의 책임을 지적하는 유진의 목소리는 통쾌하지만 설명적이다.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유진은 교육청 장학사가 “적당히 하자. 교육부까지 가실 거냐”라는 질문에 높은 현실의 벽을 제대로 느낀다. 분노와 모멸감 사이 어딘가를 표현한 배두나의 표정 연기는 ‘말문이 막히는’ 관객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장편영화 첫 주연작을 맡은 김시은은 비정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소희를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인물이 느끼는 좌절감과 비극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며 사실감을 높였다. 점차 창백해지는 소희의 얼굴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소희’들의 심정을 명확히 표현했다.

‘다음 소희’는 지난해 5월 한국 영화 최초로 제75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고질적인 문제가 아닌, 해외 각국에서 많은 ‘소희’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기간에도 여수에서 정박한 실습선에 붙은 따개비를 따던, 폭설 중에 야근을 하던, 일주일에 70시간이 넘은 도장 작업을 하던 아이들이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영화 ‘다음 소희’는 이 죽음들을 소희라는 인물을 통해 복원했다. 소희는 홍수연 양의 삶으로부터 숨을 얻었지만, 이건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다음 소희’다. 한국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제의 죽음이 내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연쇄의 의미, 그리고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는 절박함을 담은 경고가 새겨져 있다.

김민주기자 kmj@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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