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빌렌도르프의 눈
[좋은 시를 찾아서] 빌렌도르프의 눈
  • 승인 2023.02.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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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는 비너스의 둔부다

반으로 잘라낸 너의 골짜기

흥건한 단물 속에 잠든 사랑 깨어날까 봐

깔아 놓은 키친타월

쓱쓱 과도로 살갗 저밀 때마다

태풍과 벼락에 떨던 두려움

고해성사 되어 줄줄 녹아내린다

바람이 별을 소쿠리에 주워 담던 저녁

앙! 터트리고 싶었을 울음

오래도 참아 왔으니

발갛게 부풀어 올라도 괜찮아

풀숲에 쭈그려 앉아 보던

겁 많던 노루의 안타까운 엉덩이

비린 살내음 번지는 그 자리

꿈은 다산으로 익어야 했다

붉어가는 구간마다

치열했던 인내가 키운 단맛

목젖 울렁이도록 나 탐하고 싶다

◇ 박옥영=경북 군위 출생. 이조년백일장 차상 수상. 대구문인협회, 형상시학회 회원.

<해설> 잘 익은 사과를 오래 들여다본다. 하나의 대상을 오래 그리고 본질 너머의 본질을 만나려는 시인의 몸짓은 한 때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물시> 시 쓰기 방식을 이 시인의 시 『빌렌도르프의 눈』을 통해서 사과라는 대상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사과를 두고 다신을 상징하는 빌렌도르프 비너스라니! 그것도 그 비너스의 눈 이라니! 한편의 시 안에서 현재인 키친타월 위라는 장소와 고대의 어느 동굴쯤이라도 자연스레 넘나드는 시공간의 응축이 놀랍다. 원죄 설화를 품은 사과는 지금 풀숲에 시인을 쭈그려 앉게 한다. 앉은 그 자리에 먼저 다녀간 배란기 노루 냄새를 시인은 오감을 통해 만나고 있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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