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노곡동 魯자와 원대동 院자를 합쳐 노원동이 태어나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노곡동 魯자와 원대동 院자를 합쳐 노원동이 태어나
  • 김종현
  • 승인 2023.02.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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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로원의 유래 찾기
1975년 서구·중구 할애해 북구 신설
달성서씨 학유공파 세보의 ‘달성도’
와룡산 기슭에 노원 적고 기와집 그려
‘대구 따로국밥‘은 고담대구의 별칭
신라어 ‘특별히·별도로’ 뜻으로 ‘따로’
와룡산대로원
와룡산에 자리잡은 대로원.

◇노원동은 노원 혹은 대로원과 관련이 없다

단순하게 옛 명칭 노원(魯院) = 현재 행정동명 노원(魯院) 같다고 비정(比定) 하는 것에는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첫째로 현재 지도상(지형상) 대노원(大魯院)의 옛 원위치를 족집게처럼 집어내기는 사실 어렵다. 왜냐하면 금호 강물의 흐름은 최근 기록상으로도 몇 차례 변경되었다. 1930년대 현재 노원동지역은 일본헌병대의 경마장으로 쓰였던 늪지대(沼澤地)였다.

또한 1959년도 사라호 태풍으로 칠곡읍 금호동 농지가 현재 서구 쪽으로 깊숙이 물길이 밀려 들어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제강점기 지적도로 쉽게 확인된다. 1959년 이전만 해도 경진(京津, 서울나들이)나루는 구 범양식품(서구 비산4동, Coca Cola 공장)에 위치했다. 현재 대구시 북부(달서천)하수처리장(염색공단로130, 비산동)까지도 칠곡군 금호동 농지였다. 2000년경 설치된 오늘날 여성회관은 1930년대는 금호강물 속 일부였다. 1975년 북구청 신설(원대동과 노곡동 사이), 1980년 제3공단설립 이후 신천동로건설과 방제공사로 상습수몰지에서 벗어났다.

1981년 대구시 편입 이전엔 칠곡군(읍) 금호동이 대구시 행정구역에 포함되지 않아서 농지세(농지소득세)고지서가 나오면 금호강 물길을 넘어 대구에 속했던 땅에는 고지서를 전달할 수 없었다. 비상수단으로 해당지번 농지에 가서 싸리꼬챙이 끝에다가 고지서를 끼어 논둑에다가 꽂아놓았다. 나중 땅주인이나 소작농이 논물, 논메기 등 작업을 할 때 세금고지서를 챙겨들고 칠곡읍(혹은 칠곡군)에 납부를 했다. 이런 불합리성을 제거하고자 결국 태풍으로 포락(浦落)된 지역을 1981년 행정구역 개편(칠곡읍을 대구시 편입)을 통해 칠곡읍(금호동)에서 대구직할시 서구가 관할하게 되었다.

둘째로 현재 행정동 노원동은 노원 혹은 대로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75년 서구와 중구를 할애해 북구(청)를 신설했다. 즉 서구 관할 노곡동과 원대동 사이에 위치했기에 노곡동의 노(魯)자와 원대동의 원(院)자를 합쳐 노원동(魯院洞)이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1760년대 ‘달성서씨 학유공파 세보’에 그려져 있는 달성도에서도 와룡산 기슭에 노원(臥龍山 魯院)을 적고 기와집까지 그려놓았다.

물론 옛날 그림지도는 현대식 축척이 있는 지도가 아니기에 스케일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엔 ‘대로원은 대구부(관아)에서 서쪽으로 6리에 있음’으로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거리를 명확하게 확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이라도 오늘날 감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2.8㎞~3.4㎞ 범위를 누구든지 찾을 수 있다.

◇‘별도로’, ‘비밀로’에 해당 신라어 ‘따로(大魯)’에서 대로원(大魯院)이!

서울 사람들에게 대구하면 누구나 한 마디씩 하는 말이 대구 따로국밥이다. 여기서 ‘대구 따로국밥’은 고담대구(Gotham Daegu)의 별칭이다. ‘따로’란 말이 신라어에선 ‘따로(大魯, talu)’이고, 백제어에 ‘담로(談魯, 擔魯)’, 고구려어로는 다물(多勿, 오늘날 다름)로 삼국사기 동명성왕편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같은 의미로 특별히, 별도로, 비밀리라는 뜻으로 신라 삼한일통의 극비 화랑수련시설 ‘따로원(大魯院)’, 백제는 해외특별관할구역인 22담로, 고구려는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비밀강역확장을 ‘다물(多勿)’프로젝트라 한다.

고구려의 사례는 광개토왕비에 있다. “북부여는 옥황상제의 자식으로 어머니의 하백”이라는 구절에서 ‘하늘(天帝之子)+물(母河伯女郞)’이란 의미를 합하여 우물 정(井, 오늘 #)자를 상징마크로 정했다. 국왕에서부터 온 백성들까지 고구려 물건에는 우물정자(井 혹은 Sharp #)표시를 새겼다. 이른바 온 나라가 옛 땅 찾기에 와신상담했다. 심지어 신라 사람이 고구려 국왕행사에 참여해 기념품으로 받아온 광개토왕호우가 1946년 호우총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릇에 명문으로 ‘(井) 을묘년 국광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10’이라고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다물 프로젝트와 관련된 물건에는 하나같이 우물정자(#)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신라 ‘꽃사내(花郞)’의 집단이름이 화랑(花郞)인데 540년부터 681년까지 화랑도의 활약상을 그린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따르면 제1대 위화랑(魏花郞)의 이름을 따서 화랑도라고 했다. 화랑도의 심신수련을 통한 삼한일통의 ‘신라천년대계’는 632년 선덕여왕이 수립했다. 이에 따라 김유신과 김춘추를 국가동량으로 발탁하고 동시에 화랑도를 도야시켜 중용·박탈하기로 했다.

당시 삼한일통대계를 비밀리, 특별히, 별도로 추진한다고 해서 속된 표현으로 ‘따로 대계(大魯大計, Secret Grand Plan)’라고 했다. 국왕의 생각이 따로, 대신들의 생각이 따로따로 놀고 있다는 비아냥거림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화랑도 심신수련만은 초지일관이었다. 600년 경 원광법사로부터 사량부(沙梁部) 귀산(貴山)과 추항이란 화랑도가 화랑오계(花郞五戒)를 전수받았다. 원광법사의 수제자 의현(義玄)은 630년부터 중악 선본사(禪本寺)에서 삼한일통을 기원하는 관암대석불(冠巖大石佛, 오늘날 갓 바위 돌부처)을 8년간 망치작업을 하여 638년에 완성했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논어의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는 수련을 하고 맹자가 말했던 “동산에 오르면 노나라가 작아 보이고,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라는 호연지기를 함양시켰다. 신라 땅의 가운데에 있고, 가장 영산신력(靈山神力)이 넘쳐흐르는 중악(공산)에서 요산요수지기(樂山樂水之氣)를 선덕여왕 재위기간(632~ 647) 중에 집중적으로 도야시켰다.

물론 631년 경 선덕여왕이 될 덕만공주(德曼公主)는 중악 부인사에서 삼한일통의 대계를 위해서 고민하던 중에 고구려의 ‘다물대계(多勿大計)’를 벤치마킹해 ‘신라천년대계’를 착안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중악에 대한 영험을 몸소 경험했기에 중악과 금호에 화랑수련시설을 마련했다. 금호 섶 와룡산록에 화랑도 숙소(臥龍山麓大魯院)를 640년 전후로 설치했다. 분명히 행정구역상으로는 달구벌현(達句火縣)에 속했지만 군사시설인 관계로 642년 김유신장군이 압량주 초대 군주로 임명되고부터 화랑도 출신자답게 대로원에 대해서 애착을 갖고 관할을 하게 되자 ‘행정구역 따로, 관할권 따로’라는 불만에서 ‘따로원(大魯院)’이라고 불렸다. 비밀리 추진하는 ‘따로(大魯)’에서 시시각각이란 ‘따로(大魯)’로 의미가 변천했다.

노원(魯院)과 화랑(花郞)의 관계를 찾고자 동서고금을 찾아봤으나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향토사에 조예가 깊으신 지인께서 “서울 노원구에 화랑대역(花郞臺驛)이 있는데, 노원과 화랑이란 관련이 깊다”고 귀띔을 해주었기에 화랑대역, 화랑대 전시관(박물관), 화랑대 네거리 및 화랑대공원이 서울특별시 노원구(蘆原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노원구는 1988년 도봉구에서 분구 신설되었으며, 화랑대(육군사관학교)역은 1991년 태릉역을 화랑대역으로 개칭했다. 이렇게 화랑대역이 신설됨에 따라 네거리, 공원, 전시관(박물관) 등이 생겨났다. 그런데 화랑대란 태릉에 1948년 설립된 육군사관학교를 일반대학교와 구별되게 해운대(海雲臺), 계룡대(鷄龍臺)처럼 큰 대(大)자가 아닌 뜰 대(臺)로 지었다고 노원구청 홈페이지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진년(庚辰年)에 태어났다고 유사한 한자를 찾아서 유신(金庾信)이라고 지었던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 진천군에서도 화랑도 수련도량이 많았기에 노원(魯院)이란 지명을 검색해 봤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진천군 이월면 노곡리(老谷里)와 서원리(書院里)를 합쳐서 노원리(老院里) 혹은 노은곡(老隱谷)로 한 것이 보였으나 화랑과는 무관했다. 오늘날 “살기론 진천이 제일 좋다(生居鎭川)”라는 말과 1971년부터 김유신장군 출생지라는 상징성으로 ‘생거진천 문화축제(生居鎭川文化祭り)’가 시작되었다.
 

 
글·그림=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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