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느림! 위대한 치유의 힘
[치유의 인문학] 느림! 위대한 치유의 힘
  • 승인 2023.02.2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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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삼 대구한의대 교수
일상의 삶에 지쳤을 때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여러분은 어디로 가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내가 가야할 곳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어제. 미친 듯이 바쁜 일을 끝낸 오늘. 당신의 몸과 마음이 간절히 쉼표를 원한다면 그건 손에 꼭 쥔 펜을 내려놓으라는 신호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코로나 전 필자의 50대 중반은 강렬했다. 슈퍼맨과 아이언맨 중간 즈음을 달렸다. 전국에서 들어오는 한 달 평균 15곳의 강연요청을 온전히 소화했다. 대학 강의 중간에 집필과 작품 활동으로 몸과 마음을 올인 했다. 그 사이를 쪼개 꼬박꼬박 운동까지 했고 봉사까지 다녔고 창업까지 했으니 주변에선 필자를 워크홀릭이라고 불렀다. 그것 때문에 2021년에 '대한민국 스승상'까지 받았으니 후회는 없으려나?

하지만 후유증은 컸다. 뇌가 셨다운 되었다. 쉼이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뭘 할 때가 가장 행복하지?' 스스로의 질문에 찾은 나의 대답에 내가 놀랐다.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종이에 키워드를 썼다. 군불 때기, 늦잠자기, 천천히 걷기, 하늘보기 그리고 빈둥거리기.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필자를 참 유별나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떤 독자는 그게 무슨 휴식이냐고 웃을 것 같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내 몸이 원하는 소원, 전남 해남의 겨울 군불 때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저녁 어스름 시간 해남 시내에서도 한참을 떨어진 한옥 집에 도착했다. 인심 좋은 주인장의 군불 때는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솔잎으로 시작해서 작은 마른가지를 넣었다. 불이 일어나면 조금 큰 가지를 넣고 마지막에 소나무 장작을 가져다 넣었다. 세상에 제일 재밌는 일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했다지? 불구경을 넘어 불멍까지 가면 최고의 힐링 타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다른 나무와 달리 소나무와 잣나무가 최고의 화목으로 꼽히는 이유는 소리에 향기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부엌문으로 들어온 겨울바람에 코끝은 시렸지만 바람을 타고 불길이 아궁이를 지나 고래 굴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타타닥~, 송진과 함께 불붙은 나무가 내는 소리는 세상의 시름을 잊게 만드는 최상의 ASMR이다. 때마침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어느새 마당을 하얗게 바꾸었다. 앞쪽 빨갛게 숯이 된 곳에 랩으로 싼 고구마 두 개를 묻어놓고 한옥 중방으로 들어왔다. 아랫목은 콩 땜한 황색장지가 새까맣게 탔다. 그곳이 아랫목 자리라는 오래된 표식이다. 중방의 여닫이와 미닫이 격자문을 여니 침묵으로 떨어지는 눈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너무 좋다' '너무 좋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감탄사를 혼자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2시간 동안 넣은 군불은 오래된 한옥의 중방을 뜨끈뜨끈하게 데웠다. 얇은 요를 깔지 않았다면 데일 정도의 뜨거움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얼굴만 내어놓고 말없이 30분을 밖만 쳐다보았다. 눈을 머리에 얹은 낮은 돌담너머로 수평의 산과 들. 산과 들 사이에 두어 그루 소나무가 사이좋은 가족처럼 서있을 뿐 걸림이라곤 없다. 그곳에선 시간이 길을 잃는다.

필자가 묵은 한옥 중방엔 TV가 없었다. 심심하더냐고? 천만에 텅 빈 공간과 텅 빈 시간이 주는 귀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군불때고 장작패는 정도의 작은 노동은 지친 몸을 치유하는 활동의 시간이었고 불멍하고 눈 내리는 밖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은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도시에선 시간이 나를 삼키지만 이곳에선 내가 시간을 삼킨다. 아침 9시가 훌쩍 넘어 잠에서 깼다. 무슨 대수일까? 작정하고 떠난 느림의 여행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중방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니 아침 햇살이 방안까지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1월 한겨울의 아침 햇살이 맛있게 따숩다. 그렇게 필자는 며칠을 그렇게 보냈다.

자연을 헐지 않고 지세에 순응해서 세운 대흥사에서 유배 간 천하의 명필가 추사도 만나고 이광사도 만났다. 어디 그뿐인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두륜산의 바람이 걸리는 곳에서 초의선사도 만났다. 그래서 대흥사의 길목에는 인문학의 향기가 났다. 시간이 나는 오후 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낯선 길을 걸었다. 걸음을 바꿔 천천히 도착한 한옥 부엌 아궁이에 다시 불을 지피며 또 하루를 감사했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이 나를 위로하고 치료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불꽃은 내게 간지럽게 속살거렸다.

텅 빈 가슴속에 감사함이 소리 없이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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