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오늘의 꽃
[달구벌아침] 오늘의 꽃
  • 승인 2023.02.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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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흙으로 그릇을 빚을 때,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작은 틈이나 공기의 거품을 놓치는 일이라고 한다. 바로바로 손으로 매만져 틈을 메워야 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거나 그냥 놓아두면 그릇을 구울 때 꼭 깨지거나 갈라진다고 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이처럼 바로바로 해야 하는 것들이 꽤 많이 있지 않을까.
끼니마다 챙겨 먹고 난 후 식탁을 바로 치우는 일부터 주고받는 대화 속, 사소한 말실수에도 미루지 않고 바로 사과하는 일 등등. 그냥 놓아두게 되면 식탁은 곰팡이가 설거나 역한 냄새를 피우게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망에는 거미줄을 치거나 원치 않는 틈이 생기고 말 것이다.
등을 보이며 걸어가거나 달려가는 길, 운전석에 앉은 경우에서처럼 깜빡이를 켜 드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잊어버리거나 까먹어선 안 되는, 한순간 잘못된 선택이나 습관으로 인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기에도 부족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얼마 전, 단것을 먹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 생각이 난다. 주말이면 가끔 찾긴 하지만 문득, 평일 저녁엔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다. 손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기생크림케이크를 사서 친정으로 향했다. 느닷없는 딸의 방문에 기뻐함도 잠시 엄마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너 혹시 무슨 고민이 있는 건 아니지?'하고 묻는다. 자식이 갑자기 전화하거나 찾아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겁부터 덜컥 난다고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겨 연락이 없으면 잘살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산다는 엄마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하고 물었더니 대뜸 '책 읽고 있었지'라고 대답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기억력이 흐려져 고민이었는데 마침 노인대학에서 선생님이 기억력을 보완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감동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가능하면 일상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엄마가 생각해 낸 방법은 대개 이러한 것들이었다. 경비아저씨께 인사 잘하는 것, 작은 것이라도 생기면 이웃과 나눠 먹는 것, 그리고 감동적인 책을 많이 읽는 것 등이다. 책을 읽고 있는 엄마를 위해 주방으로 가 차를 끓이고 케이크를 잘라 예쁜 접시에 담았다. '엄마 덕분에 내 기억력도 좋아지겠네. 엄마가 나를 감동을 줬으니까'라며 인증 사진을 찍어 드렸더니 엄마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을 그때, 이 사진 한 장이 내가 의지하고 살아갈 삶의 기준이 될 거라 믿어본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 옵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김용택 시인의 '노을'이라는 시를 입 안에 넣고 막대사탕처럼 궁굴려 본다. 저무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이해하게 되는 삶의 뒷모습, 사랑의 뒤태를 부둥켜안아 본다. 뜨거웠던 사랑이 데리고 온 것들, 보이지 않았던 무게와 그늘을 헤아리고 기꺼이 감당하게 되는 과정이야말로 사랑이 피워낸 진정한 꽃이 아닐까.
손길을 더하고 마음을 다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수록 매끄럽고 견고해지는 건, 그릇만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하루도 보통의 인간관계도 실은 꽤 열심히 매만지고 정성과 관심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을 깨닫는다. 비가 올 것이니 우산을 준비하라며 쳐 주던 천둥 번개의 예보처럼, 누군가 단것을 먹고 싶다고 말할 때 한번쯤 뒤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미처 놓쳐버린 틈은 없나 다시금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하루의 가장자리, 서산으로 지는 해가 붉은 신호등을 켜든 채 외등처럼 서 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외등을 끄지 않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작고 사소한 이해와 수고를 마음의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두는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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