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 뿌리
[달구벌 아침] 뿌리
  • 승인 2023.03.0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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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몇 년 전 아들이 시내에서 대학생들이 동아리 홍보를 하면서 준 것이라면서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진 작은 종이를 들고와서 홍희에게 주었다. “뿌리만 살아 있으면 꽃은 핀다”라는 글이었다.

홍희는 베란다에 서른 개가 넘는 화분을 키우고 있다. 하나씩 늘리다보니 숫자가 많이 불었다.

방안에 있는 작은 화분들도 거의 스무개가 넘으니 합치면 50개가 넘을 것 같다. 아직은 크기가 크지 않은 것들이다.

올 겨울만 잘 넘기면 다음 봄에 쑥쑥 자랄 것을 생각하고 정렬된 화분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작은 새끼 손가락만한 것들이 손바닥만큼 자라고, 팔뚝만큼 커진 상상이 하루를 즐겁게 해 주었다.

식물을 잘 키운다고 홍희에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키우는 방법은 단순하다. 물, 공기, 햇볕이 적당하게 주어지도록 가끔 들여다 보면 된다.

홍희는 거의 매일 한 번씩 들여다보며 숨을 쉰다.

홍희덕분인지 식물들은 잘 자랐다. 베란다 창문이 방한이 잘 되어서인지 영하 10도 넘는 겨울 추위를 잘 이겨내고 있었다.

혹시나 얼까봐 추위에 약한 것들은 미리 작은방으로 옮겨 놓았다.

빈방이라 보일러를 틀지 않는 곳이고, 낮에는 햇볕이 들도록 블라인드를 비스듬히 내려 놓았다.

주말 낮에는 바람이 통하도록 창문을 열어두었다. 그래서 다들 무사히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한 겨울 추위가 가고 봄이 온 것처럼 따뜻한 날씨가 될 때 베란다 화분 흙이 건조해 보였다.

그동안 물을 너무 주지 않아서 말라있었다. 오래간만에 물을 주었다. 이제 잘 클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갑자기 날씨가 돌변해서 다시 영하 십 몇도로 뚝 내려갔다. 갑작스런 추위에 몸 켠디션이 좋지 않아 몸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나니 다시 날씨가 풀렸다.

토요일 빨래를 걷으려고 베란다로 나갔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앗다. 식물들이 물미역처럼 축 쳐져 있었고 어떤 것들은 누래져 있었다. 대여섯개만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햇볕이 봄마냥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홍희의 뇌는 흑백이었다. 아마도 이번 강추위에 얼어버린 것 같았다.

지난 번 추위에도 괜찮아서 안심했는데 왜 얼었지 하고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물을 준 기억이 났다.

물기가 흙속에 남아있던 순간에 영하 십 몇도의 기온에 얼어버렸던 것이다.

지나친 물주기가 부른 화였다. 가슴으로 전달되자 통증이 왔고 어깨까지 뻐근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1년동안 잘 가꾸어온 것들이었다.

한 동안 그냥 배버려두었더니, 녹아내렸다. 말라비틀어졌다.

그 모습이 더 안타까워 녹아내린 식물은 뽑아냈다, 누래진 식물은 그냥 두었다.

뿌리는 살아있을 지도 몰랐다. 뿌리만 살아있으면 꽃이 핀다는 말씀처럼 다시 푸른 잎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직장일이 바빠서 시간이 잘 갔다. 한달이 넘었다. 앙상하게 메마른 가지를 보며 결국 죽었나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뽑기는 쉬우니 더 두고보기로 했다. 봄이 곧 올 것이니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결국 오늘 보니 잎이 났다.

마른 가지 가장 아래에, 얼지 않아 마르지 않은 가지에서 새 싹이 났다. 뿌리는 살아있었던 것이다. 다행이었다. 1센티미터도 안 되는 크기로 삐죽 솟아난 잎은 어린 싹이 아니었다.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새순이었다. 아들이 가져온 메시지마냥 뿌리만 살아있으면 꽃이 핀다.

뿌리가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오늘 홍희의 뇌는 다시 생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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