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옥순 작가 개인전…대백갤러리 12일까지
윤옥순 작가 개인전…대백갤러리 12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3.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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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 보다 감상자를 위한 미술로 전환”
동양 정신 ‘지수화풍’ 추상 표현
30년 교직 떠나 뉴욕 현대미술로
“이상향은 결국 제 안에 있었죠”
꺾이지 않는 해바라기 ‘자화상’
정체성 추구해도 실험정신 계속
“정반합 과정 끊임없어야 진화”
윤옥순작-이데아를향한비상2
윤옥순 작 ‘이데아를 향한 비상’
윤옥순작-대망를향한비상-1
윤옥순 작 ‘대망를 향한 비상’

인생에서 한 번 이상은 방향 전환에 대한 유혹을 느낀다. 이때의 반응은 두 가지. 몸을 던지는 도전파이든가, 갈까 말까를 저울질하다 결국 익숙한 길을 고수하는 안주파이든가다. ‘도전파’는 기꺼이 뛰어들고, ‘안주파’는 주저앉는다.

윤옥순 작가는 용기파였다. 30여년간 교직과 작업을 병행하다 과감하게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자신의 미술세계를 파괴하고, 창조적 재구성을 하고 싶었다.

현대미술의 중심부인 뉴욕에 가면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당시 그의 뉴욕행은 결코 유예하고 싶지 않은 유혹이었다.

사실 그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갤러리를 운영하며 예고와 영남대에서 후학양성 했으며, 작업까지 병행하며 지쳐갔다. 다양한 위치에서 결이 서로 다른 미술 행위를 영위하는 기쁨은 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옥죄는 굴레로 다가왔다. 그 즈음 탈출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기운을 키워갔다.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창조적인 기운을 획득하며 작업의 발전을 모색하고 싶어진 것. 그것이 곧 영육의 자유를 획득하고픈 갈망이자, ‘탈 형식’적인 미술에 대한 갈구였다.

“당시에 새로운 미술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고, 그 절박함에 이끌려 뉴욕으로 떠났어요.”

뉴욕에서의 1년은 미술관이나 갤러리 탐방으로 채워졌다. 현대미술의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두루 감상하는 과정을 통해 시야를 넓히면 막연하게 발현되지 않고 내재되어 있던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욕 정착 3년만에 뉴욕대(NYU) 예술경영학 과정에 진학도 했다.

하지만 뉴욕을 떠나며 가졌던 ‘이상’에 대한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변했다. 중년을 훌쩍 넘긴 그가 최신 트렌드로 중무장한 청년들과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새로운 형식이나 내용을 장착한 트렌디한 미술을 구사하기에도 그의 미술적인 역량은 이미 습(習)처럼 굳어 있었다.

“뉴욕이라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저를 발견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저의 바람을 따라주지 못했어요. 저의 내면적 기운은 실험적이거나 새로운 미술을 따라갈 만큼 젊지가 않았어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추상적인 화풍을 구사했다. 우주의 근원인 ‘지수화풍(地水花風)’이라는 동양철학 사유의 변형인 ‘지수화풍(地水火風)’작업의 개념적 토대로 삼아 추상으로 풀어냈다. 꽃화(花)를 불화(火)로 대체한 것은 자신의 사주에 불이 많은 것에 대한 반영이었다. 당시 그의 화두는 “동양의 미의식을 현대회화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그 핵심 주제가 ‘생명 에너지의 본질’인 ‘지수화풍’ 이었다. 당시 그는 ‘땅(地)’과 ‘물(水)’, ‘불(火)’, ‘바람(風)’이라는 자연의 구성요소를 구체적인 형상보다 기운으로 표현했다.

“지수화풍을 표현했던 당시의 작업은 객관적 사실성보다 대상에 내재한 강력한 생명력의 추상적 표출에 집중했어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미학이었죠.”

새로운 미술을 찾아 떠났던 뉴욕에서의 5~6년간이 가져다준 결실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빠르게 변화하며 끊임없는 새로운 트렌드를 양산하는 뉴욕에서 오히려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게 됐다. “나는 나 일 수밖에 없었고, 나 다울 때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상향을 찾았는데 결국 그 이상향은 제 안에 있었던 것이죠.”

뉴욕에서의 깨달음은 화풍의 변화로 이어졌다. 현대미술이 추상 일변도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뉴욕에서 깨게 되면서 구상을 모색했다.

‘감상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의 모색이었다. “추상을 할 때는 작가인 저의 감정이나 태도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뉴욕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그림들을 보면서 감상자가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을 해야 하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어요. 감상자에 대한 배려였죠.”

뉴욕에서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시도하고,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적인 아트페어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퍼포먼스에 대한 명성이 조금씩 쌓여갈 무렵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우울증까지 겹쳤다. 치료와 치유가 절박한 시기였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작업을 본격화했다.

대백프라자갤러리 A관(12층)에서 10여년만에 대구에서 마련한 그의 개인전 ‘생명의 환희-열정을 그리다’에 걸린 작품 속 형상은 말과 새, 그리고 해바라기다. 작업은 외적 형태보다도 내적 기운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수화풍’의 추상 작업의 주제였던 ‘생명의 근원적인 기운’, 즉 생명력에 대한 표현의 연장이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추상에서 구상으로 변화가 눈에 띤다. 추상 작업에서 기운들이 가라앉아 있었다면, 구상 작업에선 열정과 환희의 기운으로 충천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구도와 표현에서 분출하는 그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원근이 아닌 근경과 동양화의 일필휘지의 역동성으로 대상의 기운을 최대로 끌어올린 서정이다. 비상하는 새의 찰나가 주는 역동성과 기운, 말의 눈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고귀함, 바람에 흔들리는 해바라기의 열정과 고결함 등을 표현하며 내재된 생명력을 포착한다.

“꽃이나 말, 새 등 소재의 외양적 진실보다 꽃이 환기하는 자아의 감정이나 기분에 집중하려 해요. 비록 자신은 힘들게 꽃을 피우고 비상하지만 그 존재들의 아픔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상황을 묘사했죠.”

그가 해바라기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했다. 흔히 해바라기 그림에 덧씌워놓은 ‘금전’이라는 관념과 다른 이야기였다. 그가 작업에서 사회적인 통념보다 독자성을 중요시 하는 일례다. “바람에 흔들리며 피지만 결코 바람에 꺾이지 않는 해바라기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그의 눈은 빛났고, 입술에선 행복의 기운이 배어났다.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면서 얻은 평화”라고 했다. 그의 변화된 가치관은 밝은 색채와 기운찬 형상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그가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던 시선이 긍정으로 바뀌면서 화면도 밝아졌다”고 했다. “놓을 것은 놓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니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했고, 그림도 밝아졌어요.”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작업을 추구하지만 작가로서의 실험정신은 놓치지 않는다. 소재나 구도의 변화에도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물감이나 붓 등의 재료들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간다. 물론 동양화를 공부한 이력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동양의 기운생동하는 선적인 요소들이 화면 곳곳에서 생명력으로 치환되고 있다.

“예술가는 고여 있으면 썩기 때문에 부단하게 새로운 도전을 감행해야 합니다.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 계속 진화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칠십대나 팔십대가 돼도 새로운 화풍에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전시는 1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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