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종이 한 장
[좋은 시를 찾아서] 종이 한 장
  • 승인 2023.03.1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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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리 시인

이른 봄등 뒤에서 누가 오는 소리 들려 돌아보니

구겨진 채 굴러다니는 종이 한 장이다

종이는

사람 발소리를 내며

제 마음으로 떠돌아다닌다

변덕스런 바람에 펄쩍 뛰기도 하고

낙엽 구르는 소리로 구르기도 하다가

잠잠히 서 있기도 하다가

어느 곳에 가서 조용히 멈추는데

아! 거기,

눈부시게 매화가 피어 있었다

언젠가 연인에게 썼던 서신 한 장

사연은 풍화되고 구겨진 몸만 데리고 와서

아직 꽃 핀 줄 모르는 내게

꽃피었다 전해 주고 저만치 굴러간다

◇이해리= 경북 칠곡 출생. 1998년 사람의 문학 등단. 2003년 박경리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수상, 2020년 대구문학제 대구문학상 수상. 시집 ‘수성못(2020 학이사)’ 외 4권이 있음.

<해설> 등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소리를 시인이 들었다. 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종이가, 사람 발소리를 내는 종이라고 시인의 생각은 점층적인 변신을 시작한다. 그 다음엔 종이는 종이가 아니라 봄이고 싶은 그 무엇이 된다고 시인은 상상한다. 그런 종이가 결국엔 멈추게 되는데, 어라! 매화가 핀다. 어느 과거 연인에게 썼던 서신 한 장이 사연은 풍화되었어도 어여쁘게 “구겨진 몸”으로 와서 계절에도 무감각해진 시인의 귀에 바스락바스락 꽃피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간다는 것. 이 모든 게 종이의 힘인 걸, 시인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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