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오스만 제국(1299~1922)과 튀르키예공화국
[류동학의 세상읽기] 오스만 제국(1299~1922)과 튀르키예공화국
  • 승인 2023.03.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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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의 앞 시기의 제국이다. 몽고의 서진으로 콘야를 수도로 한 쉴레이만샤가 세운 룸 셀주크(1077년~1308년)가 쇠약한 틈을 오구즈 튀르크계의 오스만1세(재위1299~1326)가 1299년 이스탄불에서 동남방으로 230키로에 있는 빌레지크주의 쇠위트에서 독립하여 오스만 공국을 세웠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제36대 메호메트6세(재위1918~1922)까지 623년간 북아프리카,동유럽,서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오스만 1세 이후 오르한 가지(재위 1326~1362)가 1326년 4월 부르사(세계문화유산)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이후 오르한은 비잔티움 황제자리를 노리던 칸타쿠제노스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칸타쿠제노스(요한네스6세)를 도와서 1352년 유럽의 관문인 갈리폴리(현 겔리볼루)지역을 진출한다. 이후 무라드1세(재위 1362-1389)술탄은 동트라키아의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1363년에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후 무라드 1세는 세계최초의 군악대를 만든 예니체리를 창설하여 1389년 6월28일 세르비아의 코소보전투에서 세르비아,불가리아,보스니아,왈라키아 기독교연합군을 물리치고 발칸 지역을 확보하였다. 무라드 1세의 영묘가 현재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있다. 바예지드1세(재위 1389~1403)는 1396년에는 불가리아와 그리스 북부까지 다뉴브 강 이남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1878년 베를린 조약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바예지드 1세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신성로마,잉글랜드,헝가리,프랑스 등 유럽연합 십자군을 격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카이로에 망명해 있던 압바스 제국 칼리프로부터 술탄(Sultan)칭호를 부여 받아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마르칸트의 군사천재전략가인 티무르(1336~1405)가 세운 4,400,000 km²의 영토를 가진 티무르제국(1370~1506)군에게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패했다.
이후 무라드2세는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 코소보 전투에서 헝가리 주도의 기독교십자군에 연승하고, 1453년 메흐메트 2세(재위1444~1446, 1451~1481)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기원전 753년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제국(기원전27~1453)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며 밀레트 제도를 활용해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했다, 바예지드2세(재위1481~1512)는 내치에 집중한다. 이 시기에 이란 지역에 시아파의 12이맘파의 이스마일 1세(재위1501~1524)샤한샤가 타브리즈에서 사파비 왕조(1501~1736)를 개창한다.
이후 수니파 이슬람교도인 야부즈 셀림1세(재위1512~1520)는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이스마일 1세를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격파 사파비 왕조의 수도 타브리즈까지 함락한다. 셀림1세는 1516년~1517년에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1250~1517)를 멸망시킨다. 또한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타와킬 4세는 자신의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하였다. 이후 오스만은 1922년까지 칼리프와 술탄을 겸한 정치종교의 이슬람 제국이 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군주론》에서 셀림1세를 조부 메흐메트 2세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고 평한 바 있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만든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그 당시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동지중해와 수에즈, 아덴, 바스라, 무스카트 등의 페르시아 만까지의 서아시아와 모하치 전투를 승리하고 헝가리의 동유럽를 장악하고 합스부르크 가의 심장부인 빈을 포위했다. 또한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와 아르메니아,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과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로마 교황청과 베네치아,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동지중해의 제왕이 되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1571년 레판토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에 패하고 휘렘술탄 이후 쾨셈 술탄이 지배하는 '여자 술탄 시대'인 17세기 중반까지는 쇠퇴하게 되었고, 권력이 술탄에서 하렘으로 나중에는 예니체리 사령관으로 넘어갔다. 메흐메드 4세, 슐레이만 2세, 아흐메드 2세, 무스타파 2세(1695~1703)재위기인 1656년부터 1703년까지 47년간 알바니아지역 출신의 쾨프뤼뤼가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이 시기를 '쾨프뤼뤼 시대'라고 부른다.
메흐메드 4세(재위1648~1687)는 조모 쾨셈과 모친 하타제 투르한의 섭정이후 쾨프륄뤼 파샤와 파즐 아흐메드를 대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 시기는 제3차 오스만-폴란드 전쟁(1672-1676)으로 현 우크라이나 지역의 포돌리아까지 점령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역사상 최대 영토를 지배하였다. 이후 1683년 2차 빈 포위에서 기독교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신성동맹이 승리하여 이슬람세력은 영원히 유럽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압둘메지드,압둘아지즈 시기에 근대식 대개혁인 탄지마트(1839~1876)를 단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퇴한다. 그 후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는 앙카라를 수도로 튀르키예 공화국을 선포한다, 세브르 조약을 페기하고 1923년 로잔조약에서 현재의 튀르키예의 영토조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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