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강변의 갈대는 지금도 떨리는 가슴으로 노래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강변의 갈대는 지금도 떨리는 가슴으로 노래
  • 김종현
  • 승인 2023.03.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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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문고 선율에 선학(仙鶴)이 춤추는 금호
바람이 호숫물 위를 스치면 물결이
바람결에 갈대는 거문고 줄이 되어
갈댓잎마저 태평소 되어 늴리리야
금호강에선 노래 한마당이 펼쳐져
부부금슬에서 금슬은 ‘거문고·가얏고’
거문고는 ‘검은’과 ‘고’가 합쳐진 말
왕산악 연주에 검은 학이 춤 추며 내려 와
삼국사기에는 현금·현학금이라 기록
고싸움
고싸움(고풀기)과 거문고

◇ 금호강이란 대자연의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지구상에 수많은 악기가 있었는데도 하필이면 어떤 연유로 비파(琵琶, pipa) 소리 나는 호수(風蘆琶聲)라고 해서 금호강(琴湖江)이라고 했다는 경북지명유래총람(慶北地名由來總攬)의 설명이 있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첫째 작은 나라로 대국을 섬기겠다는 생각(以小事大)에서 중국전통 악기로 알았던 ‘비파’는 사실상 전한(前漢, BC 202~AD) 때 인도를 통해 도입된 페르시아(Persia)의 고대 악기였다. 인도의 법화경 방편품(法華經 方便品)에 ‘비파뇨동발’이라는 구절이 있다. 둘째로 중국 악기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해 우리 악기로 만들었다. 즉 매듬(고)라는 순수한 우리말의 ‘거문고(玄鶴琴)’와 ‘가얏고(伽倻琴)’가 그것이다. 이들을 버리고 중국 악기를 택했다(棄我擇他).

무엇보다도 금호에 바람이 호숫물 위를 스치면 물결이 인다. 이때 햇살은 방끗거리고, 물비늘은 대낮에도 사이키 조명(psychedelic light)처럼 반짝인다. 이때다! 스치는 바람결에 갈대는 거문고 줄이 되어 서로들 몸을 맞대어 비비면서 탄금성(彈琴聲)을 자아낸다. 갈댓잎마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태평소(太平簫)가 되어 늴리리야다. 이렇게 갑작스레 금호강에선 노래 한마당이 펼쳐진다. 이런 대자연의 거대한 금호강 거문고를 우리는 몰랐단 말이다.

이와 같은 대자연의 예술성을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 시인이고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9~BC 55)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 6권)’라는 저서에서 “예술형식은 모두가 대자연에서 유래했다. 자연이 바로 예술의 모델(模範)을 인간에게 제공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새들이 지저귀는 울음소리를 본따서 노래와 시를 창작했다. 갈대까지 울리는 바람을 보고서 피리를 만들었다(poetry that everything in nature can be explained by natural laws).”. 금호 강변의 갈대는 바람에 떨었던 몸짓으로 태평소 혹은 향피리의 떨판(reed)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떨리는 가슴으로 노래하고 있다. 금호강은 거대한 대자연의 거문고로 소리 없는 탄금성으로 달구벌의 연연세세(年年歲歲) 평화복락(平和福樂)을 기원하고 있다.

금호강변에 살았던 선인들은 대자연의 거문고를 인식하고 삶의 풍요를 위한 터전으로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 흔적을 더듬어 보면 : i) 261(沾解王15)년 2월에 달구벌 초대 달성성주로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임명했다. 나마는 신라 관등계급(11등급)이고, 극종은 거문고 명인(玄琴名人)을 칭하는 직업명칭이고 또한 사람이름이었다. 삼국사기에 ‘거문고’를 설명하기를 “탄금성에 학들이 춤을 추었다는 데서 현학금(玄鶴來舞, 遂名玄鶴琴)”이라고 불렸다. ii) 신라 선인들의 거문고 예술의 꿈(玄鶴琴之夢)은 현군 세종까지 이어진다. 세종은 거문고 예향에 맞게 옥보고(玉寶高, 신라경덕왕 때 악성)의 후손인 옥고(玉沽, 1382~1436)와 성씨마저 거문고 금씨(奉化琴氏)인 금유(琴柔, 생년미상~1446)를 대구군지군사(大丘郡知郡事)에 임명했다. 금유는 1444(세종26)년에 금학루(琴鶴樓)를 세워 지역 선비들이 선학금호(仙鶴琴湖)라는 풍류(행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현대인의 시각에선 달구벌 달성성주, 대구현감 혹은 대구군지군사는 오늘날 대구시장에 해당한다. 즉 초대시장에 거문고 명인 극종을, 거문고 명문가 출생 옥고 시장과 성씨마저 거문고 금씨인 금유시장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오늘날 오페라하우스에 해당하는 금학루(琴鶴樓, Opera House Geumhakru)를 세웠다는 사실을 봐서도 1,760년 전부터 대구예향(大邱藝鄕, Art City Daegu)을 이미 기획했다.

◇‘고’ 지우고 푸는 한민족의 대동놀이(大同戱)에서

우리의 고유 전통악기인 가얏고나 거문고를 언급하기에 앞서 중국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주유와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을 두고 서로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받는 모습을 그려보자. 그때 연주했던 ‘유량탄금(瑜亮彈琴)’ 혹은 ‘제갈·주유 금슬화명’이란 고사를 통해 “주유와 제갈공명은 둘 다 영웅으로 같은 전략을 내다보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주유(周瑜)를 세상에 내셨거늘 어찌 또 공명을 내리셨나이까”라는 원망도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손유연맹’으로 조조(曹操)를 물리쳤으나 주유는 제갈공명을 질투한 나머지 군사(軍師) 제갈공명을 없애버릴 생각까지 했다. 이래서 선인들은 탄금(彈琴)이란 표현에 악기연주로 탄식(以琴歎聲)을 쏟아낸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함에도 우리나라의 판소리 ‘적벽가 화용도(赤壁歌 華容道)’에선 “그때여. 공명선생, 남병산을 퉁퉁퉁~올라가 동남풍을 빌어 볼 제, 머리 풀고 발 벗은 차 학창의 거둠거둠...”이라고 세상 고통의 고풀이(解結世苦)를 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부부금슬(夫婦琴瑟)에서 중국 악기 금슬(琴瑟)은 우리 고유 전통악기 ‘거문고(琴)’ 혹은 ‘가얏고(瑟)’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는 다르다. 우리 말 ‘고’란 ‘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고름)처럼 맨 것’ 혹은 ‘상투를 뜰 때 머리털을 고리(고름)처럼 되도록 감아 넘긴 것’을 말했다. 즉 줄을 단단히 묶고자 고(結, tie)를 지(틀어)어 만든 악기를 ‘~고’라고 했다. 물론 오늘날 악기 종류로는 현악기다. 1527년 최세진이 저술한 ‘훈몽자회’에선 ‘琴 : 고 금’으로 풀이했다. 오늘날까지도 고 싸움은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로 광주칠석(光州漆石)에서 하고 있다. 그곳 국가무형문화제 제33호는 고싸움놀이 전수자다. 그 놀이에선 짚을 여러 갈래로 꼬아 거대한 매듭(고)을 만든다. 안동에서도 견훤·왕건사이 ‘원한의 고’를 차전놀이(車戰戱)라는 ‘고풀기놀이(解結戱, knot-untying play)’를 하고 있다. 고싸움(고풀기), 차전놀이(고 부딪쳐 풀기), 줄다리기(풀린 고 잡아당기기) 혹은 윷놀이(풀린 고 비녀 던지기) 등은 대동사회를 바랐던 한민족의 3,000년 이상 전통을 가진 대동놀이(大同戱)였다.

◇금호탄금에 선학은 두등실 춤추고

거문고는 ‘거문(검은, 玄)’과 ‘고’가 합쳐진 말이다. 한자로는 현금(玄琴) 혹은 현학금(玄鶴琴)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고구려 왕산악(4세기 인물)이 당나라의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칠현금을, 원양왕8(552)년에 전통악기 거문고로 개량해 신라에 전달했다고 돼있다. “왕산악의 연주에 검은 학이 춤을 추면서 내려 왔다(以王彈琴, 玄鶴來舞).”는 고사를 들어서 삼국사기에서는 현금 혹은 현학금이라고 기록했다. 신라는 거문고를 고유의 풍류도와 결합해 금도(琴道)를 법고창신했다. 고려에선 불법, 조선시대엔 유행육례(儒行六藝: 禮樂射御書數)와 연결되어 심덕도야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거문고의 길(琴道)을 열었다. 풍류도, 원화도, 화랑도, 금도가 상호보완적 맥락을 이어왔다. 이를 두고 신라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풍류라고 할 수 있어...유불선을 모두 싸잡고 있어서 모두의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공자님의 가르침과도 같고, 석가모니의 뜻과도 같다.” 즉 풍악(風樂)이란 풍류(風流)를 형성했다고 봤다.

한민족의 선인들은 유람, 관풍, 산행, 선유 혹은 와유 등을 통해 대자연의 풍류 혹은 풍악으로 속마음까지 깨끗이 씻어버리고, 어떤 이득과 유혹 앞에서도 올곧음(大義)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무위자연섭리를 체득함으로써 화랑오계, 삼강오륜, 대의명분을 삶 속으로 스며들게 하였다. 이를 위해 나라가 위험할 때는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다(見危授命). 뜻을 세웠다고 하면, 똑 부러질지라도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寧折不屈). 구구하게 기와로 온전하기보다 깨끗한 옥으로 부서질 줄 알았다(寧瓦全而玉碎).
 

 
글·그림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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