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이야기] ‘꽃 중의 왕’ 모란도...고품격 궁중회화에 자유로운 서민 감각 더하다
[박승온의 민화이야기] ‘꽃 중의 왕’ 모란도...고품격 궁중회화에 자유로운 서민 감각 더하다
  • 이상환
  • 승인 2023.04.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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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모란에 새·풀 형식 고정
후기 풍성함 강조하며 부피 커져
말기 들어 단독화·墨 작품 유행
화려한 분위기 특징 10폭 병풍
혼례·제례 등 궁중행사 때 사용
관아서 민간에 대여하며 알려져
추상화·과장화·도안화…
궁중양식 넘어 다양하게 변형
독특한 韓 추상화로 자리매김
코로나 이후에 마스크도 벗고 꽃놀이 가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뉴스에서는 어디에 상춘객이 역대 최대로 모였다고 하고, 어디는 기후 변화로 꽃이 일찍 피어서 축제 기간 전에 봄꽃이 다 떨어져 버릴까 걱정이기도 하단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즐거운 봄 풍경 소식이다.

이제 벚꽃은 만발했고 곧 사라질텐데, 벌써부터 그 다음 순서로 필 모란이 그리워 진다. 모란은 동아시아에서 여름 연꽃, 가을 국화, 겨울 매화처럼 봄을 대변하는 꽃이다. 원산지는 중국 중서부로 3세기경부터 재배되었다. 수(隨)나라 시절 부터 ‘꽃 중의 왕’으로 불렸으며, 당(唐)나라에서는 황궁 정원에 심어 임금이 사랑하고 아꼈다. 모란을 낙양화(洛陽花)라 부르듯 기원전 8세기 동주(東周)시대 이래 아홉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의 봄 ‘모란 축제’는 대단했다고 한다.

오늘날 조선 시대 궁궐이나, 비록 화면엔 작가명이 없으나 뛰어난 실력의 궁중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모란도 10첩 병풍>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모란도10폭명풍
<그림1> 모란도 10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모란도의 소재인 모란(牡丹, 학명 Paeonia suffruticosa Andr.)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지만, 열매로 번식하지 않고 뿌리로 번식하기 때문에 ‘수컷 모(牡)’ 자를 쓰고, 꽃이 여러 색이지만 붉은색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붉을 단 (丹) ’ 을 취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문헌 상의 모란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모란도화(牧 丹畵圖)와 모란 씨앗을 보내왔다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모란도화의 모자가 수컷 모자가 아니다. 본래 모란의 한자는 ‘牡丹’이었는 데, 『동국정운』(1448)의 기록인 ‘次第(차제)’를 ‘차례’로, ‘牡丹(모단)’을 ‘모란’으로 발음한다는 규정에 따라 모란으로 읽게 되었다.

모란은 상징성이 매우 강한 꽃이다. 여러 상징적 의미 중 부귀, 화왕, 미인이 가장 대표적이다. 모란꽃이 크고 탐스럽게 피어난 모습을 군왕의 풍모에 비유하여 ‘화왕(花王)’이라 하였으며, 곧 임금을 상징했다. 꽃의 생태적 아름다움과 화려함으로 인해 부귀한 자들의 정원에서 귀하게 가꾸어졌고 대접받았다 해서 ‘부귀지화(富貴之花)’로도 상징되었다. 이 밖에 여러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이 중 ‘부귀’라는 함축적 의미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 그림 속 모란은 새와 풀, 모란이 함께 어우러지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 중기에 자주 그려졌던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조선 후기에는 모란의 비중이 커지고 풍성함이 강조되며, ‘채색모란도’와 먹으로만 그린 ‘묵모란도’로 다채롭게 그려진다. 조선 말기에는 모란만 단독으로 그려지는 모란도가 유행했다. 모란도 병풍은 조선 시대 왕실에서의 종묘제례, 가례(嘉禮, 왕실의 혼례), 제례(祭禮) 등의 주요 궁중 의례와 행사 때 사용되었다. 10폭에 이르는 대형 화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모란 나무들은 화려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색색의 꽃과 무성한 잎이 돋은 모란이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모양의 괴석과 어우러졌다.

이제 먹으로 그린 모란을 살펴보자.
 

허련작묵모란도
<그림2> 허련 작 묵모란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묵모란도는 특히 조선 말기에 유행했는데, 이런 유형은 제한된 먹색만으로도 충분히 탐스러운 모란 꽃송이를 그려내는 게 특징이다. 조선 시대 말기 화단의 허련(許鍊, 1808~1893)은 수묵 위주의 <묵모란墨牡丹>을 즐겨 그려 뛰어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이 그림은 수묵 위주로 먹의 농담을 잘 살려 단순히 아름다운 장식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격조를 높여 문인화의 소재로 선뜻 승격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괴석을 함께 그린 병풍과 모란화첩 등 모란은 전해 내려온 작품 수에서도 단연 선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조선 전체를 통해 묵모란을 가장 즐겨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이제 민화 모란도를 둘러보자.

모란병풍의 시작은 크게 왕실의 의례를 위한 용도와 왕실의 처소를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어 책례(冊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등의 왕실 가례(嘉禮)에 널리 사용되었다. 아울러 왕실에서는 국장과 국혼 같은 행사가 생기면 도감(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여 일을 진행 시켰다. 병풍을 준비하는 일도 도감의 업무 중 하나였다. 행사 후 도감은 병풍을 일반 사가(私家)에 대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모란도가 민간에 흘러나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민화모란도가 발생한 이유인듯도 싶다.
 

괴석모란도병풍
<그림3> 괴석모란도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민화 모란도는 궁중 회화에서 시작된 화려한 색감과 뛰어난 회화적 장식미가 서민들의 미감과 융합되어 나타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다이내믹한 요소도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민화 모란도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모방을 넘어선 복제와 융합을 통해 서민들만의 창작 방법을 고안해 내었으며, 이 과정에서 형태의 변형과 추상, 과장과 단순화, 도안화, 대중화가 나타났다. 결국 후기 모란도의 조형적 특징은 서민들의 미적 ‘조합’에 의해 창출된 ‘한국적 추상’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민간 화공의 독특한 붓놀림이 더해져 후기 모란도만의 독특한 회화성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며칠전 칼럼을 준비하면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며 지금 막 봉우리가 맺힌 모란을 찍어보았다.

오래전부터 우리들이 사는 곳에 있었는데.. 관심이 없었는지... 모란을 찾으려니 그것도 싶지가 않았다.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처럼 이 꽃이 지고 나면 여름이 성큼 다가오겠지만, 며칠 전 지인(知人)이 보내주는 시 한 구절에 모란 꽃을 그리워해 본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 김경미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나뭇가지에서 한 번/ 허공에서 한 번//바닥에서 밑바닥에서도 한 번 더//봄 한 번에 나무들은 세 번씩 꽃 핀다.

필자는 이 시에 한 구절 더 넣고 싶다. “봄 한 번에 그림 속에도 핀다.”

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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