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그녀가 모성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던 순간
[백정우의 줌인 아웃] 그녀가 모성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던 순간
  • 백정우
  • 승인 2023.04.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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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길복순1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스틸컷.

길복순. 그녀는 최고다. 이 바닥에서 누구나 추앙하는 전설이다. 판단력과 순발력과 영리함이 남다르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는 유사품에 불과하다. 다른 킬러들이 한가롭게 건당 수수료나 계산할 때 그녀는 자존심과 가족을 모두 챙긴다. 특급과 2급의 차이다. 그들이 자기 회사에서 넘버원이라면, 길복순은 전체를 통틀어 온리 원이다. 웬만큼 미쳐서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길복순을 만든 동력은 광기다. 한마디로 미친 짓의 대가라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고, 타 회사 직원을 도륙내고, 보스의 여동생도 죽이더니 끝내 보스의 숨통까지 끊어버리는 미친 짓. 제아무리 전설의 킬러라도 틀과 규범이 엄연한 세계에서… 돌이켜보면 길복순은 시작부터 미친 아이가 아니었던가.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잠입한 킬러에게 미성년자 운운하며 자기 발로 아비 숨통을 끊어버리고는 암살자의 세계로 입문한 아이가 길복순이었다면, 그녀에게서 인간미 따위는 기대할 게 없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가 벌인(변성현 감독이 길복순을 통해 그린) 최고의 미친 짓은 모성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마다 어김없이 장착한 ‘모성 강박’은 길복순에게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여자배우가 원 톱인 한국영화에서 여성캐릭터는 필연적으로 억세거나 폭력적이거나 복수심에 불타기 마련이었다. 여기에 모성에 잠식당하거나 모성을 이식 당함으로써(뜬금없이 아이가 등장하거나, 가련한 아이를 만나거나) 전사의 이미지를 버리고 여성성을 회복한다는 것. 예컨대 ‘차이나타운’이 그랬고 ‘악녀’와 ‘미옥’과 ‘미쓰 백’과 ‘마녀’가 모두 같은 궤도를 달렸다. 반면 길복순은 복수도 정의도 도덕도 아닌 자기생존을 위해 일을 수행하는 존재다. 변태적 폭력 성향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킬러가 됐고, 평범한 누군가의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된 여자다. 심지어 영화에 주체적으로(남성의 호명에 의존하지 않고) 등장한다.

길복순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살육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밤, 가짜여권과 권총을 발견한 딸과의 대화. 모성에 포획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감독은 뜻밖의 퇴로를 열어주며 깔끔하게 정리한다. “엄마가 다닌다는 회사, 국정원이지?” 이 대사는 “내가 너 없는 세상을 사는 게 지옥일까, 아니면 네 딸이 이 모습을 보는 게 지옥일까?” 라는 보스 말에 길복순이 무릎 꿇지 않는 배경이 된다.

길복순이 계속 킬러일지 새 인생을 살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전설이 될 것이다. 과정이 냉혹하고 비도덕일지라도, 필요할 때마다 미친 짓을 되풀이하다 보면 그녀의 인생도 삶도 더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 것 같다. 변성현 감독의 ‘길복순’은 모성은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교육과 훈련으로 완성되는 것인지와 관련한 논쟁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지금 여기서, 그게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 길복순은 딸만 지킨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지켰으니까 말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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