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영남 선비들,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요산요수 풍류 즐겨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영남 선비들,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요산요수 풍류 즐겨
  • 김종현
  • 승인 2023.05.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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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금호강물이 굽이치는 사양정사(泗陽精舍) 앞에서
낙동강 중심 ‘영남유림’ 유학 세분화
퇴계학·남명학·낙중학으로 구분·논의
낙중학, 다른 두 학파 절충지역 규정
대표 유학자로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
금호-낙동강 두물머리에 ‘누정’ 집중
사양정사금호선유
사양정사 앞 금호선유.

◇금풍학(琴風學), 금호풍류가 낳은 영남선비의 강안문학

최근 칠곡군청(칠곡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등에선 임란 이후에 낙동강 중류에 형성되었던 선유문학을 낙중학(洛中學)이라는 이름으로 학술발표를 했다. 성주군에서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무흘구곡(武屹九曲)을 중심으로 영남 선비문화의 진수만을 엮어 문화창달을 도모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구광역시는 문화정신보다 토건개발중심 ‘금호강 르네상스’를 기획하고 있다. 한강 정구 선생이 금호 수변에서 만년을 보냈던 2곳인 사수(泗水)와 노곡(蘆谷)이 낙중학에 흡입되고 있다. 한강 정구 선생이 낙향 후 8년간 후학을 양성했던 팔거현 노곡은 오늘날 대구 북구 노곡동이 아닌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615번지 가실성당 자리로 과거 노곡정사(蘆谷精舍)가 있었던 곳이다.

사수(泗水, 오늘날 대구 북구 사수동)엔 한강공원(寒岡公園)과 사양정사(泗陽精舍)라는 문화유적까지 있음에도 블랙홀 낙중학에 흡입된다면 넋이 빠진 몸만 남게 되는 것이다.

2010년 6월 4일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원장 이윤갑)이 ‘낙중학’연구발표회를 개최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영남유림의 유학을 세분하여 낙동강 상류는 안동을 중심으로 퇴계학(洛上學), 낙동강 하류인 남명학(洛下學)과 낙동강 중류인 선산, 고령, 성주, 칠곡, 영천, 청도, 합천 및 대구를 낙중학(洛中學)이라고 구분해 논의했다.

낙중학의 특이성을 퇴계학 혹은 남명학에 끌려가거나 두 학파의 절충지역으로 규정했으며, 직설적으로 말하면 변방유학 혹은 경계유학이었다.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영천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선산 야은 길재(吉再, 1353~1419)가 사림의 씨앗을 뿌렸고 이후에 숲은 낙상(洛上)과 낙하(洛下)지역으로 퍼졌다. 포은 순절 후 길재 등 제자 13명이 동화사에서 모여 불사이군을 결의한 뒤 낙중세속(洛中世俗)으로 낙향했다. 낙중에서도 선산에 길재의 제자였던 강호산인 김숙자(金叔滋, 1389~1456)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청도 출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달성 출신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김종직은 조의제문으로 두 번이나 조선유학사의 큰 획인 사화계기(士禍契機)가 되었다. 이는 곧 15세기에 ‘사림의 혼령(士林之魂靈)’을 잉태시켰다. 16세기에 점필재는 ‘사림 텃밭(士林中心)’을 마련했다.

이렇게 낙동강 중류에서 낙중학을 밋밋하게 흘려보내고 말았다면, 16세기에 금호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한강 정구 선생의 한강학파(寒岡學派)와 인동(仁同) 출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여헌학파(旅軒學派)라는 거대한 금호풍류유학(일명 寒旅學派)이 빛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1601년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오고부터 영남유림의 본산이 되었음에도 낙중학이란 거대한 블랙홀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장현광의 후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으로 명맥이 화려하게 연결되었다.

금호풍류학의 거송(巨松)은 금호변 팔거현 노곡과 사수정사에서 만년을 보내셨던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다. 그는 성주목 사천방 유촌동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향년 76세로 별세하실 때까지 팔거현 노곡과 문주방 사수리(북구 사수동) 사양정사에서 후학양성에 주력했다.

그의 호는 한강(寒岡) 혹은 회연야인(檜淵野人)이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였으며, 경학은 물론이고 풍수지리, 천문학, 예학에도 밝았다. 당대 명문장과 필서에서도 대가였다. 유행덕목(儒行德目)은 주자가례를 교과서로 생활했다. 왕사부동례설(王死不同禮說) 즉 “왕과 사대부에 대한 예법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창시자였다.

이후 제자들이 왕사부동례설(王死不同禮說)로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에 빌미를 제공했다가 허목, 윤휴, 윤선도(尹善道, 1587-1671, 1660년 甲寅禮訟) 등의 제자들이 피해를 받게 되었다. 그는 한려학파(寒旅學派)의 정치가로 사화에서도 살아남은 경기·영남의 근기남인(近畿南人) 성리학파와 남인실학(南人實學)에 있어 학문적 비조(學問的 鼻祖)가 되었다.

1608년 대사헌으로 임해군 옥사에 용서를 주청하고, 관련자 처벌을 상소하고 낙향했다. 1613년 계축화옥(癸丑禍獄) 때에도 영창대군 구출 상소까지도 실패했다. 다시 사직 낙향했다. 말년에 칠곡 사수리(현재 북구 사수동) 사양정사에서 후학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이언적-이황에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정구-장현광의 영남학파를 접목해 한려학파를 창시했다. 근기남인으로 윤선도, 허목, 윤휴, 유형원, 이서우(1584~1637, 광주이씨 칠곡파), 이원정, 이하진, 이담명, 이잠, 이익(李瀷, 1579~1624, 이하진의 아들), 신후담, 권철신, 권일신, 안정복, 채제공, 이중환, 이가환 등 쟁쟁한 인물을 배출했다.

오늘날도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를 심었던 한강 정구선생은 사수동에 있는 한강로와 한강근린공원(寒岡近隣公園)에 존함이 남아 있다. 수매산(水埋山, 섬뫼 혹은 蟾山, 34.9m/sl)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복원해 놓았고, 그 옆에 사수정사(泗水洞)를 재건하였다. 그래서 사양정사의 북편 산(泗陽北山)이라고 ‘사북산(泗北山, 237.3m/sl)’이란 지명까지 남아 있다.

◇선유풍류로 동주의식(同舟意識)을 심었다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武屹九曲)은 1) 봉비암(鳳飛巖), 2) 한강대(寒岡臺), 3) 무학정(舞鶴亭), 4) 입암(立巖), 5) 사인암(舍人巖), 6) 옥류동(玉旒洞), 7) 만월담(滿月潭), 8) 와룡암(臥龍巖), 그리고 9) 용추(龍湫)가 들어 간다.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흘구곡(武屹九曲)을 혼동하고 있는 이가 많다. 팔거현(오늘날 지천면 창평리)에 녹봉정사(鹿峰精舍)가 1561년에 설립되었다. 녹봉정사는 350년간 세칭 낙동강중류유학(洛中學)의 강학에 중추역할을 해왔다.

한강 정구 선생을 비롯하여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에게까지 낙중학이라기보다 정확하게 금호풍류학통(琴湖風流學統)을 이어왔다. 오늘날 다사읍 이천리 이천정사(伊川精舍)와 완락재(琓樂齋)에서 거처했던 서사원(徐思遠), 수성구 황금동에 영모당(永慕堂)에 기거했던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24), 그리고 선산 여헌(旅軒)의 장현광(張顯光)이 요산요수풍류(樂山樂水風流)를 즐겼던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에서처럼 서로 학문적 교류를 통해 한려학파를 형성해 왔다.

영남 선비들은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요산요수풍류를 즐겼다. 이에는 학문적 교류가 기반이 되었다.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兩水里)에는 누정(樓亭)이 집중되었다.

1899년도 대구부읍지에 기록된 금호강과 낙동강 수변에 있었던 누각과 정자를 가나다순으로 살펴보면, 금호정(琴湖亭, 府東琴湖上), 농연정(壟淵亭, 府北夫仁同臺), 달성재(達城齋, 在北五里達城下), 사우정(四友亭, 角北南山), 선사재(仙査齋, 河濱琴湖江上), 성재정(盛才亭, 北三十里解北), 세심정(洗心亭, 琴湖上), 속계재(涑溪齋, 府北東), 아금정(牙琴亭, 鄭師哲/ 1530~1593), 압로정(狎鷺亭), 영벽정(暎碧亭, 府西四十里洛江上), 오암재(梧巖齋, 在北二十里), 와룡정(臥龍亭, 府在南三十里), 용담정(龍潭亭, 在北七里燕巖下), 우모재(寓慕齋, 在東十里東村), 이락정(伊洛亭, 樂齋 徐思遠), 적지정(赤池亭, 府東二十里東村), 전귀당(全歸堂, 府北), 추원정(追遠亭, 府南二十里巴峰), 태고정(太古亭, 府北四十里), 하목정(霞鶩亭, 西洛江邊), 화산정(華山亭, 在南八十里), 화암정(花巖亭, 在府西二十里), 환성정(喚醒亭, 北琴湖) 등이 있었다.
 

 
글·그림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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