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달팽이 소묘
[좋은 시를 찾아서] 달팽이 소묘
  • 승인 2023.05.1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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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숙 시인

들이민다 아니 붙들고 늘어진다

아니다 오히려 끌어당긴다

아예 등줄을 뚝뚝 끊어내고 있다

등줄기 따라 오그라드는 벗은 몸의 치수

등을 가로지른 줄이라 등줄이지 똥줄인 것

몸을 밀어내기 위해 오그라뜨리는 압축의 통점

똥줄 타게 살아내는 것이 달팽이뿐이랴

세상 몸들 저렇게 똥줄 태워가며

줄을 긋고 밀려나고 다시 줄을 대는 퍼포먼스

느릿느릿 민달팽이 한 마리

홀랑 벗은 채로 세상의 경계선을 넘어간다

혓바닥에서 뱃가죽까지 애써 들이민다

예민해진 촉수 있는대로 끄집어내

쑥쑥 뽑아서 칼처럼 휘둘러보기도 하며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몸

결코 초라하게만 보이지 않은 맨살

똥줄 태워 그려내는 저 화끈한 획들

◇박언숙= 경남 합천생. 2005년 ‘애지’등단. 시집 ‘잠시 캄캄하고 부쩍 가벼워졌다’.

<해설> “들이민다, 붙들고 늘어진다, 끌어당긴다” 행위나 동작을 연발하는 시인의 의도는 살아있는 달팽이를 더욱 달팽이답게 진정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한편의 시안에서 의식의 옥죄임에 자유롭고 싶어 하는 시인의 의도된 심리에 닿아있다. 시인은 달팽이의 한순간을 달팽이답게 묘사하지 않으려 한다. 달팽이의 전 생애를 다각도에서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입체적 묘사를 통해 시간에 다른 다양한 변화를 한 폭 소묘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달팽이는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없다. 시인이 시로 쓰려는 것은 달팽이가 아닌 똥줄, 즉 사는 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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