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 남→북으로 흘러…한반도의 일반현상 거슬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 남→북으로 흘러…한반도의 일반현상 거슬러
  • 김종현
  • 승인 2023.05.2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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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샛걸(新川)의 명칭과 생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통일된 ‘금호’
조선시대에 ‘서호’ 별칭도 가져
신천, 비슬산 최정산에서 발원
가창면 대천서 금호강까지 흘러
육로, 대구 육상교통 대동맥 역할
과거 물길, 오늘날과 같음 확인
금호강동고서저
금호강은 동고서저·북고남저에 반해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그림 이대영

◇와유문화의 르네상스 한류(Korea Wave)

한반도 선인들이 특이하게 대자연 풍류를 즐겼던 와유문화(臥遊文化)가 오늘날 뉴미디어시대에 한류(韓流, Korea Wave)로 법고창신(法古昌新) 하고 있다.

육체노동을 기피했던 조선 선비들이 대자연을 축소 시킨 가산(假山), 누정(樓亭) 혹은 선유(船遊) 등을 통해서 와유(臥遊)를 했다면 오늘날은 텔레비전, 유튜브, SNS 등의 뉴미디어를 통해서 ‘지구촌 안방(home of global village)’에서 와유할 수 있도록 한류를 재창출하고 있다. 특히 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란 대질환이 지구촌을 덮자 한류는 급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전세계적인 ‘저출산 고령화’의 파고는 반드시 와유형한류(臥遊形韓流)를 지구촌 풍류(global wave)로 정착시키고 말 것이다.

지난해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에서 2022년 2월 말 현재로 ‘2021 지구촌 한류 현황’이란 한류 팬(Korea-Wave Fan)을 조사해 보았다. 116개국 1억5천660만 명을 돌파했다. 10년 사이에 17배가 증가했다.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는 지역은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미주지역이다. 전년도 1천459만 명에서 102% 증가한 2천888만 명으로, 남미(南美)에서도 아르헨티나, 페루 등에서 K-pop 등의 인기가 급격하게 상습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1억1천575만 명으로 전년도 9천566만 명보다 21%가 증가했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은 전년도 112만 명보다 92% 증가한 233만 명이다.

“전 세계로 퍼진 코로나 위기에서 더욱 활성화된 글로벌 영상 콘텐츠 플랫폼의 활약은 한류 콘텐츠에 경쟁력을 더해 주었다.”고 하겠다.

◇고서지학상 금호강

끝으로 고서지학(古書誌學)상 금호(琴湖)란 통일된 강 이름을 갖게 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최초이다. 이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곳곳에서 다양하게 표시했기에 통일된 금호강 이름은 없었다. 오늘날 다사(하빈)지역에서는 금호를 신라 땐 다미르(datmir, 多斯美流)’ 혹은 ‘돛미르(dotmir, 都斯美流)’라고 했다. 경덕왕16(757)년에 한자명칭으로 변천해 ‘하빈현(河濱縣)’이 되었으나 속명 ‘다사(多斯)’였다.

조선시대에선 ‘금호(琴湖)’혹은 ‘서호(西湖)’라는 별칭까지 가졌다. 또 다른 지역 칠곡(八居里縣)에선 신라어로 ‘아시미르(阿尸彌流, asi mir)’라고 했다. 한자로 ‘봉황호(鳳凰湖)’다. 신라 경주왕실에서도 ‘아시미르(鳳凰湖)’에 걸맞은 거문고 명인 ‘극종(克宗)’이란 인물을 초대 달성성주로 261년에 임명했다. 당시 속내는 삼한열국(三韓列國)이란 춘추전국시대를 맞아 간과전쟁(干戈戰爭)을 ‘거문고 화음(玄琴和音)’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즉 거문고처럼 사전 조율을 통한 평화체제 즉 손자병법의 상병벌모(上兵伐謀)를 기획한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거문고 명인 나마극종(奈麻克宗)이 최고 적임자라는 중론에 따라 임명되었다.

금호는 세월 속에서도 갈댓잎 풀피리, 갈대 태평소를 만들어 태평성대의 물길 따라 유유히 흘렀다. 비로소 조선시대 태종 때에는 옥보고(玉寶高)의 후손 옥고(玉沽)를 현감으로, 그의 뒤를 이어 세종 때는 성씨마저 거문고 금(琴) 금유(琴柔)가 대구군지군사(大丘郡知郡事)로 읍치(邑治)까지 했다. 여기에다가 1444년에는 ‘금학루(琴鶴樓)’까지 세워 금호풍류(琴湖風流)를 만들었으니 1454년 발간하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아예 금호(琴湖) 혹은 금호강(琴湖江)이라고 못을 박았다. 조선유학에서 있어 한려학파(寒旅學派, Hanrueo School)는 영남유림의 본산을 형성했다. 끝내 1643년에는 개진선유(開津船遊)를 계기로 근기남인(近畿南人)이라는 대동단결(大同團結) 속에 확대되었다.

금호강 섶에 수많은 누정(樓亭)을 지었고, 누정와유(樓亭臥遊)와 선유(船遊)로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즐겼던 금호풍류(琴湖風流)는 오늘날 한류의 본향이 되었다. 그런 역사를 가졌음에도 오늘날 대구는 ‘평온하게 잠만 자는 공주님(Daegu princess who sleeps peacefully)’이 되고 있다. 앞으로 ‘지구촌의 고령화’에 앞장서서 새로운 와유풍류(臥遊風流)를 만들어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선유가(船遊歌)의 후렴구가 말한다. “물들어 온다. 배 띄워라~”

◇신천(新川)이란 명칭을 찾아서

신천(新川)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비슬산 최정산(最頂山)에서 발원, 가창면 용계리 대천(大川)에서 합류해 대구광역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질러 북구 침산동에서 금호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나라엔 동고서저(東高西低)와 북고남저현상(北高南低現象)으로 대다수 물길은 동(東)→ 서(西) 혹은 북(北)→ 남(南)으로 흘러 내린다. 그런데 신천은 남→ 북 방향으로 흐르기에 한반도의 일반현상에 거슬리는 역수현상(逆水現狀, reverse-stream situation)이다. 이에 반해 육로는 오늘날 신천변에 신천동로와 신천서로가 설치되어 있어 대구시 육상교통에서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물길의 명칭은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하천(符新之川)이라는 뜻에서 신천이라고 했으나, 대구읍성 입장에서는 물난리를 가져다주는 하천(賻亂之川)이었다.

생김새로 봐서는 전형적인 사행천(蛇行川, meander stream)이었던, 신천의 물길은 용두산 기슭, 봉덕동(오늘날 효성타운), 수도산 동측(건들바위), 반월당, 동산동(옛 龜巖書院), 서문치안센터, 달성 토성을 거쳐 달서천에 합류, 금호강에 유입되었다. 1977년 출판된 ‘달구벌(達句伐)’에서나, 1995년도 ‘대구시사’에서도, 2009년 ‘대구지명유래총람(大邱地名由來總覽)’에도 대구(광역)시 공식기록에 신천의 물길이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정웅님이나 전영권 교수는 고지도(古地圖)를 기반으로 과거 물길 즉 유로(流路)가 오늘날과 같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즉 1778(정조2)년 이서 판관(判官)이 제방을 쌓아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었다는 건 공적을 미화(과오)한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i)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조선팔도여지지도(朝鮮八道輿地之圖) 및 1698년부터 1703년에 제작된 광여도(廣輿道), 18세기 중엽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대구부지도(大邱府地圖), 18세기 중기 좌해분도(佐海分圖), 18세기 중기 동국지도(東國地圖) 등을 대조확인한 결과 현재 신천 물길과 같았기 때문이다.
 

 
글=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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