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둥그런 바람의 통로를 낸 흙담집 한 채 있다
아무래도 가닿을 수 없는 거기에 있는 그대
희끗한 머리 빗기다가 당도할 그 바람
벽은 컴컴한 자궁이다
겨울은 쉽사리 아물지 않고
그리움 멍울멍울
언 초록 가지에 걸려 낡은 껍질을 흘리고
갈 수 없는 나
오지 않는 그대여
장무상망長毋相忘
솔가지 아래
여백을 벌려서 붉게
붉게 낙관하네
◇김기연= 경북 의성 출생. 1993년 ‘한국시’ 작품상 등단. 제5회 ‘대구의 작가상’수상. 시집 ‘노을은 그리움으로 핀다’, ‘소리에 젖다’, ‘기차는 올까’.
<해설> 세한도는 왠지 쓸쓸하다. 수묵화의 기법 중에서 갈필법을 주로 쓰고 있으면서 만고풍상을 겪은 소나무를 그려두고 그 아래 창이 있는 집 한 채 덩그러니 그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삭풍이 불어와 살갗을 할퀴고 갈 것도 같은 추사의 유배지 심사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이미 잘 알려진 그림을 시 안에 데리고 와서 추사가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 세한도를 건네주고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 잊지 말자는 뜻의 낙관을 찍은 것처럼, 시인도 “갈 수 없는 나/ 오지 않는 그대여” 함축적인 두 행의 문장으로 자신의 외로운 내면 풍경에 가만히 그리움의 붉은 낙관을 내려놓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