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미 작가 “논리보다 중요한 건 그리는 즐거움”… 우손갤러리 개인전
이명미 작가 “논리보다 중요한 건 그리는 즐거움”… 우손갤러리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3.05.3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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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같은 형상·삐뚤한 구획…
진지한 색면이 농담조로 변모
집·의류·숫자 등 만물이 소재
아이 놀이같지만 품격도 물씬
서양 색면회화 권위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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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작 ‘사막을 건너는 법’ 연작. 우손갤러리 제공

아이의 그림처럼 천진난만하던 이명미 작가의 그림에 변화가 감지됐다. 우손갤러리에 그의 신작인 ‘색면추상’ 연작이 걸렸는데, 쉽고 재미있는 형상들을 놀이처럼 펼쳐놓던 이전 작업과 달리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중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950년대의 미국 화가인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이나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색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이견 없는 색면회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부터 150호까지 다양한 규격에 과감한 색면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색면추상’ 연작은 우연의 산물이다. 전작인 ‘놀이’를 주제로 한 연작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색 자체가 주는 기운에 새삼 매료되면서 연작으로 완성도를 구축한 작업이다. 그가 “작업 중이던 작품이 있었는데 배경을 칠해놓고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 1년 6개월을 고민하다 그냥 색만으로도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색면추상을 새롭게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색면회화는 그가 가진 특유의 품성인 반항아적 기질의 소산이다. 그는 일찍부터 미술계의 지배적인 사조로부터 결별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반항아적인 기질을 표출했다. 1977년 서울 그로리치 화랑에서의 그의 첫 개인전이 도화선이었다. 당시 출품한 ‘놀이-PLAY‘ 연작들을 걸었는데, 주류적인 흐름에서 봤을 때 파격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단색화와 동떨어진 화려한 색채들이 화면을 쥐락펴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가볍다”라는 냉혹한 평가가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는 개념치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쾌재를 불렀다. 다양한 색을 선호하는 기질을 되살리자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워졌고, 화면에도 자신만의 아우라가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수성에 부합하는 독자적인 미술세계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희열은 유행에 편승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로 다가왔다. “첫 개인전에서 ‘이명미는 이명미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이후 지금까지 그 소신은 한 번도 변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개척은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길이지만 저는 평생 그 길에 서 있고자 했어요.”

신작인 ‘색면추상’ 역시 그의 반항아적 기질의 연장선에 있다. 서양미술사 속 색면회화가 가지는 권위를 비틀기 위해 ‘색면추상’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신격화에 버금갈 만큼 권위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대미술사가 가지는 권력에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던 것. 개념이나 논리 이전에 미술 행위 자체가 가지는 즐거움과 진정한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이 먼저라는 것이 그가 던지는 메시지였다.

“사물 같은 대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다가 이제는 색면추상이라는 미술사의 한 사조를 테마로 뽑으며, 제목도 색면추상이라고 붙였어요. 미술하는 즐거움이 개념이나 논리 위에 있음을 말하려 시도한 작업이죠.”

‘색면 추상’ 연작이 이전 작업인 놀이를 주제로 한 연작들과 달리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로 점철됐다고 하지만 이명미 특유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이명미 다움으로 이끄는 요소다. “타고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강변이라도 하듯, 5~6번 중첩한 색면에 개구진 터치들을 슬쩍슬쩍 던져놓고 있다. 낙서 같은 형상, 삐뚤게 구획된 면분할, 무심하게 그어 내린 연필 선 등의 요소들이 무거운 화면을 농담조로 변모시킨다.

그가 색면추상에 농담을 곁들이는 속내는 따로 있다. 그의 미술이 ‘감성과 직관’에 의지하고 있어서다. 논리적인 개념보다 오직 자신의 감성과 직관에 충실한 미술을 추구하고, 미술이 곧 즐거움이라는 그의 소신이 색면추상이라고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유머가 넘치는 그의 천성이 색면추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제가 예술을 하는 이유는 예술적인 표현에서 즐거운 관능을 느끼기 위해서였어요. 그런 경지는 개념이나 논리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고 봤고 색면추상에서도 그 신조를 유지하려 했어요.”

색면추상 작업 이전에도 이명미의 미술은 색이 주도했다. 감성과 직관이 주도하는 미술을 하는 그의 작업 특성에 비춰보면 색에 대한 선호는 그의 본성에 부합한다. 색을 통한 예술적 본능의 표출은 그가 미술을 통해 얻고자 하는 즐거움이다. 이번 전시에 신작으로 ‘색면추상’을 발표했지만 전작들에서도 색채가 화면을 주도했다.

색의 변주만큼이나 그에게는 소재도 놀이의 대상이다. 동물과 사람, 식물 등의 생명체부터 집과 의류, 음식 가구 등의 생활용품과 숫자와 문자 등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 존재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은 모두 ‘놀이’의 재료로 활용한다. 그에게는 삶과 놀이가 하나다.

이번 전시에서 ‘놀이’를 기반으로 한 작업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훨씬 담백해지고 더 정제되어 있다. 보색대비도 기꺼이 수용하는 바탕에 숫자와 텍스트를 그만의 유쾌함으로 표현하고, 캔버스를 이어 붙이거나 화면 위에 컨버스 조각을 콜라주처럼 덧붙이는 등 바느질적인 기법도 추가했다. 언뜻보면 아이의 놀이같은 흥미로운 기운들로 가득하지만, 정제가 이끈 품격이 화면 곳곳에서 아우라를 풍기고 있다.

그가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즉흥적인 페인팅으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완성도를 위한 섬세함이 개입된 결과”라고 했다.

놀이같은 작업이라고 하지만 이는 반어법적인 경향이 짙다.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삶의 고비마다 그는 놀이처럼 그림을 그렸다. 이번 전시의 주제이자 작품 제목이기도 한 ‘사막을 건너는 법’은 그런 그의 인생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족들과의 사별, 자신의 투병 등의 고초를 겪었다. “제 삶이 사막을 건너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더 깊은 사막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던 사막도 어느새 사라지고 초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이미 알고 있고, 그 앎은 미술로 승화시킬 것이다. “고난이 오히려 저를 강인하게 만들었고, 고난을 자양분으로 강도있는 작업에 매진했어요.” 전시는 9일까지 우손갤러리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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