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 이야기] 봉황도, 봉황 다시금 날아들어 ‘태평성대’ 이뤄지길…
[박승온의 민화 이야기] 봉황도, 봉황 다시금 날아들어 ‘태평성대’ 이뤄지길…
  • 윤덕우
  • 승인 2023.05.3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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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정치 실현된 요순시대
‘서경’에서 봉황 첫 등장 확인
창덕궁으로 거처 옮긴 순종
인정전 어좌 뒤 ‘봉황도 족자’
오일영·이용우의 ‘봉화도’
9마리 새끼 ‘구추봉도’ 표현
 
봉황도-1
<그림1> 봉황도 작가미상 20세기 초 금박에 채색 428.6×336.4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제 6월이 들어서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려간다. 필자의 직장 사무실 앞 오동나무도 이제 잎이 무성해졌다. 예전에 오동나무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는데.. 독자들은 기억을 하실라나 모르겠다. 오동나무의 무성함속에 잠깐의 여유를 가져본다. 오늘은 그 오동나무에만 깃든다는 봉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봉황은 용과 학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한다. 봉황이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이르는 말로 실제의 새가 아닌 상상 속의 새이다.

봉황은 태평성대를 상징과 성군(聖君)의 출연에만 나타나는 동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으며 기린과 함께 상상 속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기린을 닮았는데, 머리 부분은 뱀의 목에 제비의 턱, 황새의 이마, 닭의 부리를 지녔으며, 몸은 원앙의 깃에 범의 등, 용의 무늬,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다섯 색깔을 갖추었다.

기록상으로 봉황이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요순(堯舜)시대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이 시대는 유교 정치의 이상이 실현된 시기로 생각하였고, 요순 두 임금은 이상적 천자상(天子像)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우리나라의 군신 사대부들 간에서도 보편적인 것으로 통했다. 요순시대의 사적(事蹟)이 중국 상고(上古)시대 정치를 기록한 <서경(書經)>을 통해 전해지는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내용이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판별하기 힘들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임금은 역사시대가 전개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상고시대의 최고의 인물로 정치를 아주 잘했다. 봉황이 태평성대를 상징하게 된 배경에는 순임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백성들은 임금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자신의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아갔다. 이에 순임금은 음악을 만들어 궁중에서 연주를 했다. 이에 하늘에서 새가 날아와 뜰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새가 바로 봉황이다.

<서경(書經)>의 내용과 서술을 관통하는 사상은 천명사상(天命思想)이다. 이것은 만물의 근원인 하늘의 명에 따라 성인(聖人)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정치사상이다. 이것은 고대에 있어서 왕권의 정당성의 근거를 하늘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상서(祥瑞)의 관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위정자의 덕망과 위엄을 상징하는 태평성대의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원·명대에 이르면 상서보다 현명한 신하나 백성이 중요하다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봉황이 상서로서 정치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봉황은 황제(皇帝), 현신(賢臣)등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되고 소통되었다.

위 그림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봉황도 족자로서 커다란 규모와 화려한 표현으로 보아 궁궐의 실내 공간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순종 황제가 등극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정하며 인정전을 개보수 하였는데, 그 시기에 제작되어 인정전 어좌 뒤 일월오봉도 병풍 대신 걸었다고 한다.

봉황이 가지고 있는 평화와 번영의 상서로운 전조는 명대에 이르러 황제가 전국을 잘 다스리고 있다는 정치적 암시와 황제의 권력을 드러내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봉황은 어진 군주가 세상을 잘 다스려 크게 편안해지면 나오는 새이므로 훌륭한 군주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이런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또 다른 봉황도를 보자.
 

봉화도-대조전
<그림2> 봉황도 오일영, 이용우 작 1920년 제작 견본채색 214× 578cm 창덕궁 대조전.

대조전 대청 동쪽 상단 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 서화미술협회를 이끄는 신진 화가 오일영과 이용우가 그린 것으로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산해경(山海經)>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리꽃, 청록화풍으로 표현된 바위 등이 극채색으로 함께 그려져 벽화 전체에 화려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특히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과 함께 큰 가족을 이루고 있는 봉황의 그림을 구추봉도라고 하는데 중국 동진(東晋) 목제(穆帝)때 봉황이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을 데리고 풍성에 나타났다는 상서의 기록에서 유래하였다.

 

왕실 전용서 조선 말 보편화
생활용품·의례용품 등 적용
득남·안락 세속적 의미 변화
민화에선 ‘봉명조양’ 형식 인기
오동나무 아래 태양 보는 모습
길상·장식성 강화 시도 엿보여

봉황은 용과 함께 주로 왕실이나 귀족 전용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일반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었던 문양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말 사회 경제적 여건 변화에 따라 서민 계층 속으로 전파되어 보편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본래 의미가 희석되거나 변경되고 장식 목적이 달라지는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말은 서구문물 유입,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사회경제적 혼란이 가중된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도화서는 폐지와 이관이 반복되어 일부 도화서 소속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화단을 형성하고 개인 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의 활동이 궁정 화풍과 궁중장식화가 저변화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민간으로 흘러간 봉황의 모습을 살펴보자.

조선후기 민간에서의 봉황은 광명과 행운, 행복의 신으로 미화되면서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여 의례용품에도 봉황의 모습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봉황도-2
<그림3> 봉황도 20세기 초반 작가미상 지본채색 56×100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러한 사용의 확산은 득남(得男)과 안락(安樂)을 바라는 세속적 의미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봉황과 모란, 오동나무가 어우러진 그림으로 하늘높이 솟은 오동나무 아래에 한 쌍의 봉황이 서 있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우는 형식의 그림을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 한다. 조선후기 민간으로 흘러간 봉황의 모습은 봉명조양의 형식으로 활발하게 그려졌다.

구름과 구름사이의 해를 배경으로, 중앙에는 불로초가 피어 있는 괴석 위로 봉황 한 쌍이 서 있다. 화면 아래로는 기암괴석과 영생을 뜻하는 영지가 자라고 있고, 오동나무 뒤로 구름과 붉은 해가 떠 있고, 기암괴석 사이에는 드문드문 대나무 잎도 보인다. 봉황은 길고 큰 눈과 붉은 벼슬관을 쓰고 붉은색과 파란색 화려한 꼬리를 아래로 길게 드리우고 있다. 꼬리 깃은 마치 공작의 그것과 같고 고니류의 긴 다리, 기다란 뱀 목, 화려한 깃털, 닭의 부리를 한 봉황은 가슴을 유선형으로 앞으로 돌출시켜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이다.

이런 그림들은 부부 화합 등의 길상의 의미로 그려진 봉명조양에는 길상성과 장식성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들이 발견된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함께 그려 더욱 길한 의미의 화려한 그림으로 탄생시켰다. 애초에 봉황은 천하가 태평해질 조짐이 보일 때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런 날이 올 수가 있을지…. 매일 온 세계가 조용한 날이 없으니 그림으로라도 평온과 태평을 기원해본다.

박승온·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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