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깨달음 얻는 10개 과정
야생 소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
中 송나라 때 곽암선사 십우도
국내 사찰 법당 벽화 주로 장식
해탈 아닌 ‘대중 보살행’ 강조
오늘은 모든 절 벽화에 그려져 있는 열 개의 그림, 십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그림을 이해하고 나면 앞으로 불교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시작해 본다.
십우도(十牛圖)란 소와 관련된 열 가지 그림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찰 법당 외벽에 많이 그려져 있다. 이 십우도는 인간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열 가지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여 <십우도>이지만, 한편으로 인간 자신의 본성 즉, 마음을 얻는다는 뜻에서 소를 마음에 빗대어 <심우도(尋牛圖)>, 소를 찾는 그림 즉 마음을 찾는 그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호가 소를 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목우자(牧牛子)인 것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말년에 심우장(尋牛莊)으로 거처의 이름을 지은 것 등도 불교에서 소가 내 마음, 즉 불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상징하는 것에 기인한다.
심우도(尋牛圖)는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존성(存省)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畵)를 일컫는 말이다.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선의 <십우도>는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자의 비소한 내면에서 세계 일주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는 계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십우도의 시작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상생활의 가까이에 있는 동물인 소를, 자신(자기)에 비유해 자신 찾기를 하는, 이른바 <기사규명(己事究明)>의 여러 상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십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보명선사(普明禪師)의 십우도’와 ‘곽암선사(廓庵禪師)의 십우도’등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곽암의 것을 많이 그리고 있으며 주로 사찰의 법당 벽화로 많이 묘사되고 있다.
12세기 송나라의 곽암선사(廓庵禪師)이 저술한 <정주양산곽암화상십우도송병서(鼎州梁山廓庵和尙十牛圖頌幷序)>라는 문헌에 근거하여 ‘곽암의 십우도’는 제1 심우(心憂), 제2 견적(見跡), 제3 견우(見牛), 제4 득우(得牛), 제5 목우(牧牛), 제6 기우귀가(騎牛歸嫁), 제7 망우존인(忘牛存人), 제8 인우구망(人牛俱忘), 제9 반본환원(返本還源), 제10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과정을 거치는데, 깨달음을 얻게 되는 해탈의 경지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지 않고 대중을 위한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곽암선사(廓庵禪師)의 십우도(十牛圖)의 단계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심우(尋牛):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본성을 잊고 찾아 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 입문을 일컫는다.
둘째, 견적(見跡):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셋째, 견우(見牛): 동자승이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에 가까웠음을 뜻한다.
넷째, 득우(得牛):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 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다섯째, 목우(牧牛): 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여섯째, 기우귀가(騎牛歸家): 흰 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때이다.
일곱째, 망우재인(忘牛在人):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여덟째,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 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아홉째, 반본환원(返本還源):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열째, 입전수수(入廛垂手): 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나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십우도를 이해하면서 가끔씩 사찰에 있는 여러 불교 조각물중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왜 절 입구에 앉아 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 소에 관련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우리 민화에서 소의 그림은 위 그림처럼 목동이 소를 타고 있거나, 소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담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일반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연원은 불교회화의 성격을 가진 심우도에 두고 있다.
위 그림은 열 장면으로 구성된 심우도 전체를 그린 것은 아니고, 심우도 중 한 장면인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의 묘사하고 있다. 이는 소를 타고 마음의 깊은 곳으로 회귀한다는 내용이다. 배경으로 그려진 모란꽃이 귀향의 환영하는 꽃다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기우귀가(騎牛歸家)는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마음의 본향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 번뇌와 망상, 욕망이 끊겨서 소는 무심하고, 그 위에 있는 목동도 무심하게 보인다. 목동이 구멍 없는 피리를 부는 것은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에서 나오는 소리를 의미한다.
소는 불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동물이다.
부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달다(Gotama siddahartha)인데, 고타마(gotama)를 산스크리트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gi’는 명사로 ‘우(牛)’, ‘우왕(牛王)’, ‘수우(水牛)’의 뜻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tama’가 붙으면 최상급이 된다. 즉, 고타마는 ‘최고의 우왕(牛王)’이라는 뜻으로 ‘가장 좋은 소’, ‘거룩한 소’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4세기 말에 번역 제작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의 <목우품(牧牛品)>에는 부처가 열한 가지 소 치는 법을 수행자에게 적용시켜 소를 다루는 일이 수행자에게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심우도의 첫 번째 그림을 보면서 참 자아(自我)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고 느꼈다. 이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맹목적인 물질주의와 탐욕과 쾌락과 퇴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심우도를 사찰에서 발견했고, 또 종교적인 색체가 강한 그림이라 생각하지만 심우도는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하나의 영적 여행에 대한 과정을 묘사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종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심우도를 대하지는 말고, 종교의 유무를 떠나 나를 찾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영적 여행의 은유로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란다.
박승온·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