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오 이가라시 개인전…갤러리 신라 24일까지
아키오 이가라시 개인전…갤러리 신라 24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6.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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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히 칠하고 깎아낸 흔적이 ‘회화’
골판지·물감·연필 등 재료 다양
색채는 그레이·블랙·화이트 제한
대상 없이 행위에 집중하는 작업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상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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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오 이가라시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신라 대구 전시장 전경. 황인옥 기자

한 남자가 캔버스에 물감 칠하기를 반복한다. 캔버스에 적당한 물성이 형성되면 이번에는 붓 대신 사포를 들고 망설임 없이 화면을 긁어낸다. 그의 행위에 의해 물감으로 집적된 표면은 깎여진다. 아키오 이가라시의 일명 ‘깎인 그림’의 탄생이다. 칠하고 깎는 과정에서 색과 선이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형상을 구축하지만 차가운 기하학에 불과할 뿐, 형상에서 그 어떤 의미적인 맥락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는 개념적인 의미보다 그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영한 행위의 결과인 흔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깎는 행위는 물건을 갈고, 발굴하고, 발견하는 행위이며, 그 속에는 시간이 있죠. 제 회화는 시간과 만난 흔적이에요.”

60여 년 간 기하학적 추상과 미니멀 회화로 작업하고 있는 아키오 이가라시(Akio Igarashi) 개인전이 갤러리 신라 대구에서 열리고 있다. 연필로 긋거나 색을 칠한 후 깎는 등의 방식으로 구현한 회화와 설치 작품 등을 소개하고 있다.

갤러리 신라 대구에서 만난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개념은 ‘시간성’이었다.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태어나 살다 결국 생을 마감하는 인간 삶의 톱니바퀴에서 시간은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자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작가가 인간의 영향 너머에 있는 시간의 영역을 예술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도전처럼 다가온다. 감각할 수 없는 시간의 실체를 눈앞에 펼쳐 놓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인간을 지배한다. 삶 전반은 물론이고 삶의 순간순간 시간의 영향 하에 놓여진다. 인간은 의식에서부터 행동 패턴에 이르기까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절대자의 권능이며, 인간은 그저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아키오 이가라시는 자신의 미술적인 행위로 인류 보편의 질문인 시간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가려는 입장을 긴 세월동안 고수해 왔다.

“저의 회화는 제가 시간 속에서 행위 했다는 흔적입니다. 그 행위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기록이니까요.” 사실 그림은 시간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주효한 매체다. 음악의 경우 허공에 흩어지지만, 미술은 물성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회화는 “퍼포먼스 해프닝의 결과”이면서 “과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기록”인 것이다.

시간을 주제로 한 그의 화면은 시간의 실체가 가지는 난맥상에 대한 사투와 다르지 않다. 그가 ‘조형성’에서나 ‘방법론’, ‘물성’ 등에서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시간의 실체를 표면화하고자 한 시도들에서 시간을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시키도록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도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캔버스와 골판지를 병행하고, 물감과 연필 등의 재료도 다변화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시간의 흔적들을 기록해하고자 시도했다.

시간의 기록으로 드러나는 화면 속의 기하학적 형상은 절제된 선과 면으로 미니멀하게 구축된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면이 되었다가, 어떤 화면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의 면을 쌓아가기도 한다. 또 다른 작품에선 가느린 수많은 선의 집적으로만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제한적인 규격에선 면으로 집적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쌓아가고, 비교적 자유로움을 허용하는 두루마리 작업에선 직선으로 늘어트리는 방식을 선호하는 등 재료에 따라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표현방식은 유동적이지만 최종 형상은 간결함으로 귀결된다.

색채 또한 미니멀함을 유지한다. 그레이, 블랙, 화이트 등 모노톤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 또한 시간 이외에 그 어떤 사족도 달고 싶지 않아하는 작가의 의도로 풀이된다. 그가 “모든 것은 시간의 기록에 맞춰지지만 지지체에 따라 조건이 달라진다”고 했다. “캔버스는 규격이 정해져 있어 행위나 표현에서 제한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두루마리 골판지의 경우보다 자유롭죠.”

시간을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의 선택은 ‘공간’인 듯 보인다. 그의 화면에서 다분히 건축적인 공간성이 짙게 배어난다. 칠하고, 깎고, 다듬은 결과 드러난 독특한 질감과 공간성은 단단하고 매끈한 돌이나 건축적인 요소처럼 다가온다.

사실 그의 기하학적 추상 작업들은 70년대에 그가 천착했던 추상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추상에 대한 집중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그 반동으로 추상으로부터 탈피를 감행했다. 그 때 골판지 작업을 시작했고, 10여 년 간 지속했다. 1980년대부터 골판지에서 캔버스 작업으로 변화했다. 그의 작업을 기하학적 추상회화로 분류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추상과는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대상이 없고 오직 행위에 집중하는 작업의 특성에 비춰보면 추상은 아닙니다.”

행위의 예술인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부단하게 긋거나 칠하거나 깎아낸다. 단순 반복적인 신체적 행위는 정신적인 작용과 조우할 개연성이 높지만, 그는 그 둘 간의 조율을 허용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 오직 행위 자체에만 집중한다. 작업 중에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만 화면에 기록하려는 의지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의 내면은 그 순간 행위적인 희열만 가득하다. 그리하여 그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화면에 개입하지 않게 된다. 이는 그의 작업을 차가운 추상이 아닌 따뜻한 추상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가 “작품 속 이미지에서 작업 하는 과정에서의 고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표했다. 오직 시간의 흔적만 기록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였다. “작업하는 동안 육체적인 피곤함은 있지만 정신은 오히려 상쾌해요. 마라톤 선수가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 고통보다 쾌감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죠.” 전시는 24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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