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팔조령 아침구름·법이산 초승달…신천의 평화를 노래하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팔조령 아침구름·법이산 초승달…신천의 평화를 노래하다
  • 김종현
  • 승인 2023.08.0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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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천에 상산(商山)처럼 은둔했던 선비들
은둔생활 하던 신천의 선비 손린
고향이 정유재란 전화에 휩싸이자
필봉(筆鋒) 대신 인봉(刃鋒) 들고
의병 활동 통해 평화 되찾은 후
산천승경 소재로 ‘문탄십경’ 읊어
금호강십경
문탄선생이 노래한 금호강 풍류.

◇영남선비들의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신천을 따라 신라 초기엔 위화군(上村昌郡)이란 이름으로 읍성을 이루고 살았다. 경덕왕16년(757) 수창군(壽昌郡)으로 대구현을 그 아래 속현으로 두었다. 신라시대 신천은 이름값을 제대로 했던 신라의 하천이었고, 덕업일신의 물길이었다. 고려 초기부터 수성군으로 개명되어 조선 초 태조3년(1394)에 비로소 대구부에 속했으며, 태종14년(1414)이 되어 비로소 대구에 합속되었다. 세종원년(1419) 대구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수성현사(壽城縣司)가 대구임내(大丘任內)에 들어갔다. 이렇게 행정구역상 조선 태종14(1419)년 이전에는 신천시대였다. 세종원년(1419)에 대구군으로 수성현을 흡수함으로써 금호강 시대를 개막했다.

신천의 선비 손린은 1608년 3월 16일 선조가 승하한 뒤 4월에 집안에 전승해오던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눈앞에 두고 은둔의 삶을 살았다. 신천파잠을 중국 요나라 때 소부와 허유가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으라는 왕명을 받고 은거했다는‘기산영수(箕山潁水)’로 삼았다. 그래서 그런지 ‘상산사호’의 선비들처럼 파잠을 중심으로 은둔하는 선비들이 늘었다. 일당백의 파잠필봉을 휘둘렀던 계동 전경창의 넋이 살아남아 임진왜란 때 파잠복병전을 했던 손처눌, 정유재란 땐 전계신이 있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손린이 의병장으로 필봉(筆鋒) 대신 인봉(刃鋒)을 잡았다.

중원을 통일한 대제국 진나라가 분서갱유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자, 도원공, 기리계, 하황공 그리고 녹리선생 등 네 분의 선비(四皓)들이 상산(商山)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 숨어 살았던 은사들은 ‘붉은 지초의 노래(紫芝歌)’시를 읊었다. 그들이 두문불출하며 은거했던 인물풍경화를 상산사호도라고 했다. ‘붉은 지초의 노래’를 쉽게 풀이해보면 “정말 큰 산과 강, 깊은 계곡의 산길로 얽혀 있다네. 이렇게도 아리따운 보라색 신령스러운 지초(靈芝, 불로초 혹은 불사약)를 봤나. 나를 위해 한 입이라도 먹어 두어야지. 옛사람들의 노랫가락이 멀어졌으니 어디로 갈까? 멋진 4마리 마차에 앉아있는 저 사람, 온갖 걱정이 너무도 크구나. 부귀를 누릴 때는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웠지만, 빈곤하고 나니 여전히 야망만은 크다네.”

그렇다면 상산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명상으로는 협서성 상산과 안휘성 상산이 있는데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4명의 선비가 찾아들었던 곳으로 상락팔경 가운데 제1경 협서상산이 보인다. 이렇게 ‘상산사호’는 선비들의 은일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어버린다”는 출세관이 확립되었다. 1617년 상주 출신 부제학을 역임한 이준(李埈)은 “상산지”를 발간했다. 이는 오늘날 말로 상주읍지에 해당하는 저술을 개인적으로 쓴 것이다. 상주(尙州)로 물러나서 살 곳이라는 의미로 상산(商山)이라고 했다.

한편, 오늘날 고산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는 정경세(鄭經世, 1563~ 1633)는 1607년에 대구부사에 나갔다. 그는 광해군이 교서로 자문을 구하자, 만언소(萬言疏)로 i) 사치풍습 경계, ii) 공정한 인사전형과 iii) 학문의 면려를 강조했다. 1609년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 1610년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10월에 나주목사, 12월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1611년 8월에 정인홍 일당이 사간원에 탄핵하여 그는 해직되었다. 그 뒤 낙향하여 선비로 신천산록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달성십영(達城十詠)’을 노래했던 서거정 선생께서 사호도에 대해 “세상도 입신양명을 홀라당 벗어던지고, 한가한 바둑판에 대국을 놓겠다고 바둑을 던지네. 이 바둑알 던지는 묘수를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 던진 한수로 유방을 막았다는 수였다지.”라고 했던 시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정경세는 손린 선생의 사호도를 보자 ‘사호도 발문에 부쳐’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어째서 세상을 피해 영원토록 은둔생활을 하는 걸 깊이 흠모해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겠는가? 생각해보면, 선인께서 남겨 주신 뜻이라 반드시 오래도록 지켜 잃어버리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 이게 바로 효심이다. 더군다나 남겨 주신 큰 뜻이라고... 혹 벼슬길에 나아갔다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거니와. 끝내 성명(性命)을 버리고 부귀를 탐하는 데에 이른다. 이게 또한 그림 속의 선인들을 욕보이는 게 된다. 선인들께서 말씀하시는 큰 뜻에 대해 해됨이 심하다 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문탄십경(聞灘十景)을 노래했던 신천선비의 풍류

문탄(聞灘)선생(손린)은 고향 신천이 또다시 정유재란 전화에 휩싸이자 선비생활을 청산하고 ‘절대로 왜놈들이 신천을 타고 북상을 못 하게 하리라.’라는 결의로 파잠복병전을 구사했다. 그로 인해 의병장으로 평화를 찾은 후에 산천승경을 소재로 문탄십경을 읊었다. 현존하는 ‘문탄선생문집’에 161수의 시가 나오는 데 신천 물길 따라 곳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했다. 문탄십경은 i) 제1경 팔조령의 아침 구름(天嶺朝雲), ii) 제2경 병풍바위에서 불어오는 저녁 바람(屛巖暮風), iii) 제3경 법이산에 뜬 초승달(法伊新月), iv) 제4경 파잠협곡 들머리에 드리운 그림자(峽口渡影), v) 제5경 청사초 등성이에서 목동을 만남(靑莎牧逢), vi) 제6경 문전옥답(門前沃畓)에서 농부들의 콧노래(沃野農歌), vii) 파잠(巴岑)에서 본 마을의 밥 짓는 연기(巴村炊烟), viii) 수양버들 우거진 연못가에 지주석(柳淵立石), ix) 파잡협곡을 돌아보니 우거진 숲(省谷長林) 그리고 x) 문필봉에 드리운 저녁노을(筆峯落照)이다.

천령(天嶺)이란 표현은 인산(麟山) ‘김일훈(1909~ 1992) 선생 어록’ ‘천령태수편’에 의하면, 신라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갔음을 두고 천령태수(天嶺太守)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천령이란 신천의 원류인 팔조령을 의미했다. 병암(屛巖)이란 정자나 강학당을 둘려 싸고 있었던 산은 병산이었고, 암벽은 병암이다. 이산(伊山)은 오늘날 수성 못 옆의 산 이름으로 새 발(鳥足) 모양이라고 해서 신라 이후 조족산이라고 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법이산(法伊山)이라고 했다. 오늘날 파동 주변의 고개마루(巴岑)와 협곡(巴峽)을 파잠협곡(巴岑峽谷)이라고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복병전을 전개했던 곳이었다. 협구(峽口)란 협곡의 들머리를, 성곡(省谷)이란 협곡을 뒤돌아본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파잠 주변의 마을은 파촌(巴村)이라고 했다. 강학당에서 붓끝처럼 뾰족하게 보이는 산을 문필봉 혹은 필봉이라고 했다.

손린이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모습을 본 왜적들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있었다’던 문탄집의 첫머리 시를 소개한 정만진 소설가의 해석이 의외로 참신하다. 그대로 옮기면 “흰 칼을 들고 둘러서서 서로 노려보았는데, 적들은 선비를 해치지 못하고 돌아섰네. 후한 무장 손견과 오기의 병법 못 배운 것이 한스러웠네. 나라 위해 더러운 먼지를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도 지나고 신천변에 찾아온 평화로움을 노래했던 모습을 찾아보면 문탄십경 제6경 옥야농가(沃野農歌)에서 “언덕과 습지를 개간하니 작은 골짜기 평야가 되고, 군역 쉬고 귀농하니 백성들 기뻐하네. 누런 구름이 가고 뉘엿뉘엿 해가 지는데, 바람은 남쪽 향기 타고 농부의 노래 실어오네.” 뒤이어 손처눌께서 느낌을 같은 소재로 적었으니 ‘감옥야농가(感沃野農家)’라고 제목을 붙이고 소개하면, “기쁘게 보노라. 땅이 다시 평온해진 것을. 일찍이 백만의 군사가 지나며 들을 덮었지. 눈에 가득한 전답은 백성들의 즐거움이니. 완연히 옛 시절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또 하나의 목가적 표현으로 제7경 ‘파촌취연’에서 “점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은, 바람 따라 물들어 핀 흰 구름 같아라. 고운 빛은 어디쯤서 어지러운 자태 감추려나, 꽃다운 땅에 으스름 드니 실버들과 어울리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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