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급 불능의 가을이 왔다
저 한없이 트인 공중에서
내 앞에 쏟아지는 노란 추심(推尋) 딱지들
수확할 기쁨은 이미 없다
부대껴 왔던 마음
이르를 곳에 이르렀기에
여기서 차라리 안도해야 하나
헐거워진 몸뚱이는
바람에 돌쩌귀를 떠나려는 문짝으로 삐걱대어
모든 이웃한 것들이
눈 가늘게 떠
서늘히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저만치 엉버티고 선
절벽 겨울
◇ 이정화=1952년 경남 통영 출생. 1974년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91년 ‘시와시학’ 신인상 등단. 시집 ‘포도주를 뜨며’,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비’, ‘그늘의 사랑이여 나를 물어라’가 있음.
<해설> 날씨나 시간이나 계절에도 어떤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이정화 시인에게 노란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나뒹구는 가을은 내어 줄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아, 절박함이 몰려드는 그런 계절은 아닐까. 심정적 상처가 만져지는 걸로 보아 저 한없이 트인 공중을 두고도 떨어져 내려야 하는 상황이 그러하고, 추심의 딱지들이 떠오른 걸로 보아 시인의 가을은 극치의 절망이다. 안도를 묻고는 있지만 문짝이 삐걱대고 모든 이웃한 것들이 눈까지 가늘게 뜨고 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랴. 수확할 기쁨은 이미 없더라도 나무는 자신의 분신인 열매를 겨울이 몰려올 절벽 틈으로 밀어 넣으려는 어떤 실낱같은 눈길이, 되려 희망으로 읽히고 있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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