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주한미군 그렉 보엔
한탄강 유원지서 우연히 발견
아프리카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사실 입증
우리나라 고고학계 지대한 영향
빙하기 초중기 호모 에렉투스
도구 만들고 고기도 익혀먹어
땀샘 발달로 먼 거리 여행 가능
기후변화 탓 아프리카 떠나
◇한반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가 출토
BP 160만 년에서 BP 20만 년까지 신생대 제4기 홍적세(Pleistocene, 혹은 빙하기(Ice Age) 초기에서 중기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i) 기온이 약간 높은 간빙기였기에 반경 20km 범위에서 수집채취를 했던 걸, 무리를 지어 100km까지 집단수렵을 하게 되었다. ii) BP 150만 년 혹은 BP 100만 년에서도 아프리카 어느 초원에서 번개로 마른 나무(숲)가 불타는 걸 보고 그것을 이용해 난방을 마련했다. iii) 화덕(불구덩이, hearth)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었고, iv)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움(막)집을 지었다. v) 한편으로 돌을 깨어서 필요한 도구(stone tool)를 만들어 사용했다. vi) 사냥한 고기를 익혀 먹음으로써 단백질 섭취로 인한 두뇌활동과 두개골의 크기가 늘어났다. vii) 신체상 땀샘(sweat gland)이 발달해 태양 아래 오래 견딜 수 있었기에 먼 길을 갈(달릴) 수 있게 되었다.
BP 50만 년에서 BP 40만 년까지 기후변화로 인해 먹거리 찾기 어려워지자, 아프리카를 떠나 마침내 극동아시아의 끝머리 한반도에 BP 40만 년에서 BP 30만 년 경에 도착했다. 사실 최초 여행자이며 모험가였던 우리의 선인들은 수백 아니 수천 년이란 몇 대에 걸친 기나긴 여행을 통해 “먹거리가 풍부하고 따뜻한 기후에 살기 좋은 한반도(樂園朝鮮)”까지 찾아들었다. 최근에 발굴된 충북 단양 금굴(石灰巖洞窟: 丹陽郡 丹陽邑 島潭里 山4-18번지)에서 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선 BP 70만 년까지 고고학계에서는 소급하고 있다.
지구촌 북반구 중위도의 한반도에서 i) 땅을 파서 구덩이(움)에다가 막집을 짓거나 석회암 천연동굴에서 화덕(불구덩이, hearth) 주변에서 몸을 녹여 추위를 견디어내었다. ii) 돌을 깨뜨려서 만든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Acheulian stone hand ax)”를 이용해서 들짐승(사슴. 노루, 멧돼지 혹은 매머드 등)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잡은 동물의 두개골을 깨뜨려 단백질을 섭취했으며, iii) 땅속 굼벵이 혹은 곤충을 잡아서 익혀 먹었다. iv) 불로 위협하여 호랑이 혹은 멧돼지가 먹던 사냥감을 빼앗기도 했으며, v) 불 움터 인근에 모여 거대한 사냥감을 잡기 위한 작전 회의도 하였고, 이웃 부족과의 신부 교환거래도 성사했다. vi) 당시 사냥은 90%가 실패였고, 성공률은 겨우 10% 정도였다. 성공률을 높이고자 함정을 파고, 그곳에 덫을 설치한 뒤 사냥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vii) 당시 먹거리의 70%는 식물채취에서 20%가량은 물고기와 같은 어로(漁撈)에서 에너지원을 얻었다. 따라서 여성들과 아이들이 식물채취에서 계절별 식물과 식용식물을 알아내는 기초지식은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전문적이었다. 한반도 남부지역은 대나무와 같은 수목이 우거졌기에 많은 생활 도구를 목재로 만들어 썼다. 그래서 습윤한 토양에 부식되어 현재까지 남아 발굴되는 건 거의 없다.
당시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폭발과 지각운동으로 융기와 침강이 몇 차례 반복했다. 한탄강 지역은 화산활동에 의해 BP 50만 년에 경기도 연천(漣川地域) 지역은 이미 현무암지대(basalt zone)가 형성되어 있었다. 구석기시대의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漣川郡 全谷邑 全谷里)는 한탄강(漢灘江) 주변으로 온통 현무암인 강 돌(硅巖, quartzite)이 깔려 있었다. 이 강돌(江石)을 갖고 떼어내기(뗀)기법으로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Acheulian stone fist ax)’를 만들어 썼다.
아프리카와 유럽만이 구석기시대가 존재한다는 증거로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를 주장했던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할람 모비우스(Hallam Leonard Movius, 1907~ 1987)의 이름을 딴 모비우스 학설(The Movius Line)은 1978년 전곡리(全谷里)에서 돌 주먹도끼가 발굴됨으로써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구석기시대에 한반도에서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모비우스 라인에 반론 제기
고고학에서 서양의 주먹도끼(hand ax)를 아슐리안(Acheulian)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프랑스 북서부 솜므(Somme)강 섶 생 아슐(St. Acheul)에서 많은 분량의 석기가 확인되어서다. 즉 아슐리안 문화(Acheulean culture)는 인류 선사시대인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제작했던 고고학적 석기 제작공법의 하나를 말한다. 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 그리고 일부 동아시아 등지에서 이러한 석기제작공법(stone-removal technique)으로 제작된 돌 도구들이 나왔다. 이들 돌 도구를 만들었던 속칭 ‘돌 떼어내기기법(stone-removal technique, 아슐리안 제작기법)’은 BP 100만 년의 인류에게 혁명적인 석기제작기술이었다.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건어 온 인류가 최초로 제작했던 석기(石器)였고, 과거 ‘돌 깨뜨리기 법(stone-breaking technique)’으로는 불가능했던 섬세하고 날카로운 다용도 돌 주먹도끼가 만들어 졌다.
1974년부터 동두천 미국 공군 2사단 캠프 케이시(Camp Casey)에서 기상관측병으로 근무하던 그렉 보엔(Greg L. Bowen, 1950~ 2009)은 미국 캘리포니아 빅터밸리대학(Victor Valley College, California)에서 2년간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학비를 벌고자 미국 공군에 입대했다. 1877년 봄(3월) 한국인 소녀(Yi Sang Mi)와 데이트를 하던 중에 한탄강(漢灘江) 유원지에서 코펠(Coppell, コッヘル)로 커피를 끓이는데 사용할 삼발 돌을 주변에서 줍고자 물색하다가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Acheulian stone hand ax)를 발견했다. 그해 5월 지형도면에 정확한 지점표시를 하고 지표조사를 했다.
당시 세계적인 선사시대 고고학자이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보르도(Henri Louis Francois Bordes, 1919~ 1981) 교수에게 편지와 보고서를 보냈고, 프랑스 원로교수는 서울대학교 고고학자 김원용(金元龍, Kim Won Yong, 1922~ 1993) 교수에게 연계해주었다. 1978년 4월에 주먹돌도끼를 들고 김원용 교수를 찾아갔고, 그 후 현장확인 등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지대한영향을 끼쳤다. 1978년 미국 공군을 제대하고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에 진학해 1981년에 고고학과 석사 학위(Master Degree in Archeology)를 취득했다. 그는 직접 현장발굴에도 참여했다.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Acheulian stone hand ax)의 특징은 밑이 둥글고 윗부분은 뾰족한데 좌우대칭형이 되게 떼어낸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후진적인 찍개 문화권(Chopper cultural site)이라는 모비우스 라인(Movius Line)에 정면으로 반론이 제기되었다. 아슐리안 돌 주먹도끼를 제작하고 활용했던 시기는 인류에겐 호모 에렉투스로 지질시대 구분으로 보면 제2 간빙기에서 제3 빙하기의 전환기였다. 지구촌 생명체를 살펴보면 온·난계 동물에다가 매머드, 코뿔소와 같은 한랭계 동물이 출현했다. 당시 만들어진 석제 도구(stone-made tool)로는 삼각형 혹은 타원형의 손잡이 주먹도끼(握斧, hand-ax), 첨두기(尖頭器, 슴베찌르개), 긁개(scraper) 및 송곳(wimble) 등이 만들어져 쓰였다.
글·그림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