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월초파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불교계는 ‘석가탄신일’ 대신 ‘부처님오신날’을 공식명칭으로 써왔고 정부도 불교계의 요구에 따라 2017년부터 공식입장을 바꾸었다. 석가모니는 중인도 히말라야 남쪽 기슭 가비라성에서 성주 정반왕과 왕비 마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B.C 623년의 일이다.
석가모니는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를 두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의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경 구약의 천지창조와 관련한 대목들이나 흙으로 빚어 만든 아담이나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하와를 만들었다는 대목을 놓고 왈가왈부한다면 종교를 말할 자격이 없듯이, 건국설화가 그렇고 세상의 모든 종교의 출발이 그렇듯이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어 갑론을박하는 것은 어리석다. 본래 과학의 경계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종교다.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상대를 큰 품으로 포용하는 이타심이 필요하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 사찰에 연등을 밝히게 된 연원은 아사세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불제자들이 기름등을 켜서 법회 자리를 밝힌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적은 기름을 구하여 불을 밝혔다. 그리고 맘속으로 “이 공덕으로 지혜의 광명을 얻어 일체중생의 어두움을 없애게 하소서”하고 기원했다. 이 가난한 여인의 서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튿날 새벽 다른 등불은 모두 꺼졌는데 난타의 등만은 처음 그대로 밝았다.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이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다투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가르친 것은 “깨닫는 자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며, 참된 나를 되찾는 일이다. ‘참 나’는 이웃과 일체이며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일체가 된다. 그래서 불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여기게 된다. 생각만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자세를 갖추려고 노력한다면 한결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유마경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경전이다. 본래 제목은 ‘불설유마힐소설경’으로 재가거사가 설주(說主)인 독특한 형식의 경전이다. 설주는 상업이 융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인도 바이샬리에 사는 유마 거사이다. 경전은 유마 거사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문병을 당부하면서 시작된다. ‘유마경’은 “중생이 병들어 아프기에 보살도 병들어 아프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굳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이 대목만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마 거사는 ‘문질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생들이 병에 걸렸으므로 나도 병들어 있다. 만약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이다” ‘유마경’은 비단 대승불교 몫만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꼭 필요한 경전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나는 옳고 혹은 우리는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증오 섞인 진영 논리가 국가를 양분하고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이 시대의 귀감이다.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분이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으로 중앙아프리카 서부 지역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설립하고 90세로 사망하기 까지 아프리카에 있는 그의 병원에서 환자 돌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무한 갈등을 보면서 국민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가 의사단체를 이긴 역사가 없다는 주장에 이기심이 엿보인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정부와 의사단체 모두 이타행(利他行)의 대승적 삶을 고민했으면 한다.
석가모니는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를 두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의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경 구약의 천지창조와 관련한 대목들이나 흙으로 빚어 만든 아담이나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하와를 만들었다는 대목을 놓고 왈가왈부한다면 종교를 말할 자격이 없듯이, 건국설화가 그렇고 세상의 모든 종교의 출발이 그렇듯이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어 갑론을박하는 것은 어리석다. 본래 과학의 경계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종교다.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상대를 큰 품으로 포용하는 이타심이 필요하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 사찰에 연등을 밝히게 된 연원은 아사세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불제자들이 기름등을 켜서 법회 자리를 밝힌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적은 기름을 구하여 불을 밝혔다. 그리고 맘속으로 “이 공덕으로 지혜의 광명을 얻어 일체중생의 어두움을 없애게 하소서”하고 기원했다. 이 가난한 여인의 서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튿날 새벽 다른 등불은 모두 꺼졌는데 난타의 등만은 처음 그대로 밝았다.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이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다투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가르친 것은 “깨닫는 자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며, 참된 나를 되찾는 일이다. ‘참 나’는 이웃과 일체이며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일체가 된다. 그래서 불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여기게 된다. 생각만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자세를 갖추려고 노력한다면 한결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유마경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경전이다. 본래 제목은 ‘불설유마힐소설경’으로 재가거사가 설주(說主)인 독특한 형식의 경전이다. 설주는 상업이 융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인도 바이샬리에 사는 유마 거사이다. 경전은 유마 거사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문병을 당부하면서 시작된다. ‘유마경’은 “중생이 병들어 아프기에 보살도 병들어 아프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굳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이 대목만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마 거사는 ‘문질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생들이 병에 걸렸으므로 나도 병들어 있다. 만약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이다” ‘유마경’은 비단 대승불교 몫만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꼭 필요한 경전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나는 옳고 혹은 우리는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증오 섞인 진영 논리가 국가를 양분하고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이 시대의 귀감이다.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분이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으로 중앙아프리카 서부 지역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설립하고 90세로 사망하기 까지 아프리카에 있는 그의 병원에서 환자 돌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무한 갈등을 보면서 국민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가 의사단체를 이긴 역사가 없다는 주장에 이기심이 엿보인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정부와 의사단체 모두 이타행(利他行)의 대승적 삶을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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