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장기에 와서
[좋은 시를 찾아서] 장기에 와서
  • 승인 2024.05.2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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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정 시인

경상도 바닷가 장기에 와서 다산을 보았네 호랑이와 늑대가 출몰하던 마산리, 시냇가 모래밭 늙은 군교軍校의 오두막에 든 다산을 보았네 장독杖毒으로 만신창이 된 몸,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던 여정과 피붙이와의 별리까지 껴안은 다산, 일곱 자 작은 몸을 사방 한 길 방에 뉘었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를 찧지만 누우면 그나마 무릎은 펼 수 있었다네 살 맞은 새,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개미가 역린을 침범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고꾸라진 용, 자소自笑하면서 부끄러웠어라 그동안 자랑스러웠던 이름, 지난날은 호접몽이라 울분이 목울대까지 차올랐네 꽃을 보아도 내 집 꽃만 못하고 휘영청 밝은 달을 보아도 오직 내 집 생각, 산골 농부나 되어 가족과 함께 욕심 없이 늙고 싶다는 다산을 보았네 수시로 이는 절망과 분노와 좌절을 독서로 다스리며 바다의 마음을 배워 가는 마흔 살, 촌병혹치*村病或治로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푸는 다산을 보았네

어구들 널브러진 선창 가, 아이들 뛰노는 운동장, 잡초 무성한 논두렁 밭두렁, 차들이 마구 내달리는 도로 어디서나 다산을 보았네.

*촌병혹치: 다산이 미개한 장기 사람들을 위해 지은 의서醫書.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의금부도사가 한양에서 내려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분실됨.

◇정호정= 1998 ‘문학과 창작’ 등단. 시집 ‘프로스트의 샘’, ‘묘상일지’, ‘침향매향’. 전자시집 ‘십 리 벚꽃 길을 가다’.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해설> “경상도 바닷가 장기에 와서 다산을 보았네”라는 첫 행이 심상치 않다. 일반적으로 다산을 다룬 시들은 전라도 강진이 그 배경인 경우가 많은데, 송시열 선생을 비롯한 조선시대 200여 명이 다녀간 포항 장기 유배지는 다산선생의 1차 유배지이기도 하다. 시인은 마치 자신이 유배를 떠나온 정약용 선생의 된 듯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산문적인 형식을 빌려 잘 그려놓고 있다.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어구들 널브러진 선창 가, 아이들 뛰노는 운동장, 잡초 무성한 논두렁 밭두렁, 차들이 마구 내달리는 도로 어디서나 다산을 보았네.“ 라는 후반부 따로 떼어 놓은 한 연이 현재를 다룬 운문이며, 앞의 연은 촌병혹치*村病或治의 배경 기록으로 읽힌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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