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날개 먹거리와 일자리] 세종 때 공처노비 휴가제도, 산업 근대화 과정서 사라져
[미래의 날개 먹거리와 일자리] 세종 때 공처노비 휴가제도, 산업 근대화 과정서 사라져
  • 김종현
  • 승인 2024.06.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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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종의 충격요법으로 저출산을 날려 보냈는가?
세종, 노비제도에 대해 많은 고민
아이 낳으면 백일 동안 휴가 규정
이런저런 핑계로 추진되지는 않아
현장 확인 후 대언 통해 구체적 집행
가문의 門長이 책임지고 결혼 주선
가난한 자에겐 나랏돈으로 혼수비용
쌍둥이 출산 가정에는 쌀 5섬 지급
여성 도피처 ‘여승방’ 폐지 극약처방
세종의출산장려정책
오늘날보다 더 우수한 세종의 출산장려 정책.

◇조선연명(朝鮮延命)은 ‘노비의 피와 탄성(嘆聲)’으로 이어졌다.

사마천의 ‘사기’ 혹은 ‘여씨춘추’에서 “성문에 불이 나 불 끈다고 연못에 물을 퍼내는 바람에 물고기만 죽어 사람들의 피해로 돌아가게 된다. 환란은 가장 힘없는 자에게 전가되고 있다(城門發火, 淵水鎭火, 淵渴魚死, 殃及池魚).”는 구절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속담으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듣던 아프리카 친구는 “코끼리 싸움에 잔디만 고통을 받는다(When elephants fight, it is the grass that suffers).”고 했다.

조선 시대 모든 신공부담(身貢負擔)은 노비들에게 전가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가 물고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노비로 검출하니 1만2천598건(국역 7천485건, 원문 5천113건)이 나온다. 가장 많았던 왕조는 성종 때 1천490건으로 경국대전에 노비제도의 등록을 위한 공론화 과정에 사건이 비등했다. 두 번째는 중종으로 중종반정으로 개혁공신과 삭탈 당하는 훈신 사이에 논공행상하는 바람에 갈등과 잡음이 생겼다. 이때도 노비들만 들볶였다. 세 번째, 세종때론 노비종모법 등으로 750건이나 발생했다. 마치 로마제국에서 유행했던 “로마제국의 힘은 노예들의 피에서 나온다(Imperium Romanum robur ex servorum sanguine venit).”는 말처럼 “조선의 연명은 노비의 피와 한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노비제도에 대해 어느 국왕보다도 많은 고민을 했던 흔적이 나온다. 세종 원(1419)년 11월 27일 회암사 승려의 간음, 절도사건이 발생해 상왕(太宗)께서 언급했다. 이참에 사찰노비제도를 폐지하자고 대신들이 간청을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웃으면서 “나도 그렇게 폐지할 마음은 굴뚝같지만 소탐대실의 결과가 우려스럽다.” 그러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 8(1426)년 4월 17일 “서울 이외 공처비자(公處婢子)에게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도록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만들게 하라.”고 명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눈속임만으로 현실적으로는 추진되지 않았다. 현장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세종 12(1431)년 10월 19일 다시 대언(代言)을 통해 분명하게 “옛날부터 공처노비에게 아이를 낳을 때는 반드시 출산휴가 7일 후에 복무하게 했다. 이것에 대해 아이를 버려주고 복무시키니 어린아이가 해롭게 될까 걱정이었다. 일찍이 100일 출산휴가를 더 주도록 명했다. 산기가 임박하여 복무하다가 몸이 지치거나 귀가 도중에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관노에게 출산 전 1개월부터 복무를 면제케 하라. 눈속임으로 하지 말고 반드시 구체적으로 규정해 집행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렇게 세종 12(1430)년 내린 공처노비 출산일 전후 100일간 휴가제도가 일제강점기와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무노동 무임금을 준수하면서 사라졌다. 심지어 공무원의 경우 15일 출산휴가가 끝나면 병가로 2개월(60일)까지, 이후는 휴직으로 처리했다. 1999년 9월1일부터 공무원에게 비로소 60일 출산휴가제도를 도입했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일반 근로자에게도 2001년 11월 1일부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18조의2 제4항에 출산휴가는 출산한 날부터 90일 이내에 휴가를 주도록 규정했다. 출산장려정책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598년 전 세종이 공처노비들에게 주었던 100일 출산휴가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외는 더 말해 뭘 하겠나?

◇세종 때 당시 획기적인 출산장려정책은 무엇이었나?

로마제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 비결이 바로 국가지도자부터 준수하도록 강제했음에 있다. 세종도 출산휴가문제에 대해 몇 차례 어명을 내렸지만, 로마제국법률과 달리 국가지도자의 준수 강제규정을 두지 않았고 미이행 처벌규정을 두지 않았기에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If the hammer is light, the nail rises).”는 꼴불견이 되었다.

세종 때 출산장려정책에 “나라님께서는 자식을 낳으라고 하시네, 참으로 난감한데~ 지랄 미친 새끼?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고렇게도 모른다네. 짝을 지어야 새끼를 낳~제?”라는 노래가 저잣거리 주정뱅이들의 입으로 유행했다. 이를 들었던 세종은 i) 첫 단계로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가문의 문장(門長)이 책임지고 결혼을 주선하고, 결혼비용을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ii) 고아이거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혼수비용과 예식비용을 나라 곳간에서 지원하도록 했다. iii) 결혼한 노비에겐 신공(身貢)을 면제해 주도록 했다. iv) 쌍둥이를 낳은 출산가정에는 국왕의 이름으로 축하 쌀 5섬을 내렸다. 이런 전통을 조선 시대 후대 국왕들도 빠짐없이 지켰다. v) 태종 11년 6월 9일 여승의 초막을 철거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각종 사유로 결혼을 못 했던 여성의 도피처였던 여승방을 폐지하는 극약처방까지 들고 나왔다. v) 국왕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자, 지방관청은 물론이고 지방관학이었던 향교, 향청, 서원에서 인재양성과 풍속 균화란 미명으로 향약까지 만들어 출산 축하와 이웃 사이 십시일반을 추진했다. 이렇게 미풍양속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용어로 지역사회 출산장려 시스템이었다.

이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6년 2월20일에 “경기 감사가 선비 집안 여식들 가운데 고아이거나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혼수비용으로 결혼을 못 하니 국가지원을 요청했다. 국왕은 형제와 족친들에게 주혼하게 하고, 혼수비용과 쌀과 콩을 2섬씩 지원했다.” 성종 22년 1월 6일 집안 사정으로 결혼을 못 한 처녀들에게 결혼비용을 국가기관에서 부담하게 했다. 명종 17년 2월 5일에도 종실(宗室)에 가난해서 시집 못 간 자들이 없도록 관아에서 비용을 지급하도록 전교했다. 즉 종가에서 가문에 돈 없어 결혼 못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어명을 내렸다.

쌍둥이를 낳은 가정에 축하로 쌀, 콩 등 곡식을 하사했다. 이런 기록은 세종실록에만 6회나 나오고 있다. 세종2년 12월20일 “경상도 언양 땅 이신기의 처가 3 쌍둥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국왕은 축하와 쌀을 내렸다(一産三男, 賜米).”고 시작해 “경상도 언양 사람 이신기의 처가 세 쌍둥이를 낳아 쌀을 하사하다.” 등 다수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조선시대도 출산축하를 국왕(king)이 이렇게까지 했다. 세종에 비하면 오늘날 출산장려정책은 사기진작으로 보면 빵점이다. “돈 몇 푼 주곤 뚝~이다.” 대통령이 출산에 축하했다는 빈말도 못 들었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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