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변 국가 ‘약탈경제’ 혈안
中, 지구촌 대상 ‘약탈 가격정책’ 펴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에 고통 안겨
日, 한국전쟁 때 매년 40~60% 성장
1973년까지 10년간 GDP 400%↑
지금도 남·북전쟁-중·한전쟁 기다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경쟁 사회에서는 가장 값싸게 취득하는 개인적인 방법으로는 강도(强盜), 탈취(奪取), 약탈(掠奪)이었다. 인류전쟁사(人類戰爭사)에 국가 단위에선 약탈 전쟁(plunder war)이고 수탈식민지(exploitation colony)였다. 로마제국(羅馬帝國), 대영제국(大英帝國),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등을 약탈 전쟁(plunder war) 혹은 수탈식민지(exploitation colony)를 통해 국부를 팝콘처럼 몇 배로 튀겼다. 그들의 구호(口號)은“제국의 힘은 피정복국 노예의 피에서 나온다(The strength of the empire comes from the blood of the slaves of the conquered countries).”였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약탈경제(掠奪經濟, Predatory Economy)라고 한다. 과거 역사에서만 있었던 것이라고 오해하나 오늘날 지구촌에서도 약탈경제의 수법들이 많이 횡행하고 있다. “칼만 들지 않았지” 날강도와 같은 행위가 횡행하고 있다.
그럼 최근 최강대국인 미국 법무부에서는 “경쟁자 혹은 잠재적 경쟁자의 경쟁행위를 제거, 징벌 또는 기타방식으로 억제하는 행위”를 경제적 약탈(economic looting)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로는 “중국은 우대기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 지적 재산권 절도, 산업기술 이전 및 부패한 무역을 통해 세계무역기구(WTO) 협약과 국제규범인 표준을 위협하고 있음”을 세계는 꼬집고 있다. 중국의 약탈적 경제행위(predatory economic practices)의 대표적 사례로는 약탈적 가격정책을 들고 있다. 약탈적 가격책정(predatory pricing)으로 “소비자는 단기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이익을 얻는 것 같으나 성공적인 포식자가 선택의 여지를 원천봉쇄하기에 자유로운 가격 인상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소비자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한반도 주변 국가는 경제학적으로 언급하면, 하나 같이 약탈경제(predatory economy)에 혈안이 되고 있다. 지구촌을 대상으로 약탈경제 가격정책(predatory economic pricing policy)을 횡행하는 오늘날의 중국(中國), 당장이라도 남·북한에 전쟁이라도 터져서 “제2의 한국전쟁으로부터 축복(Blessings from the Second Korean War)”이 내리기를 바라는 일본의 전쟁경제(war economy)의 야욕이 도사리고 있다. 2019년 7월1일 일본 아베 정부(安倍政府)는 반도체 핵심기자재를 수출규제하겠다는 경제보복의 도화선에다가 불을 댕겼다. 우리나라 일면에서는 “당당한 반일애국(proud anti-Japanese patriotism)” 운동이 전개되었다. 과거 일본의 수탈식민지(收奪植民地)에서 횡행했던 약탈경제(掠奪經濟)의 일환인 전쟁경제(war economy)에 대해이제 우리나라는 늘 경계를 해야 한다.
일본은 과거 전쟁경제를 통해 평균 200%의 수익률이 보장된다고 확신했다. 1894~1895년간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승전함으로써 패전국(敗戰國)으로부터 전쟁배상금으로 은화 2억 냥을 받았다. 당시 일본 국가 예산총액의 400%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전쟁이 최고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국가경제발전에 최선방책이었다.
두 번째 러시아와 전쟁을 위해 아예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국제자본시장에 전쟁공채(戰爭公債)를 발권했다. 전쟁준비금으로 12억엔 정도 전쟁자금을 마련했다. 이를 투자해 1904년과 1905년에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을 하여 승전했다. 그러나 패전국(敗戰國)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戰爭賠償金)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제외교상 강대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전쟁경제(戰爭經濟)에 입맛을 들인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일본은 독일(獨逸)에게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곧바로 독일 조차지(租借地)였던 칭따오(靑島)의 독일 맥주공장이 1916년에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전쟁이 끝나자 그곳에 아사히(朝日) 맥주회사의 깃발을 달았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을 하는 동안에 일본은 7.6%의 경제성장을 했다. 그 바람에 주식(株式), 염료(染料), 선박(船舶) 등에서 벼락부자 ‘나리킨(成金, なりきん)’들이 속출했다.
‘황금의 손(Golden Hands)’ 전쟁경제에 입맛이 완전히 들었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크게 도박을 해서 “사자의 몫(Lion’s Share)”을 차지하고자 했다. 최강대국 미국까지도 한입거리로 생각했다(Even the powerful United States was considered a bite)가 결과는 예상외로 전(全)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는 참상을 당했다. 일본은 다시는 전쟁을 할 힘이 없게끔 “중소기업과 농업국가”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에 의해 비밀리 통제됐다. 그러나 러시아의 강성함과 공산국가의 흥성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을 우방으로 키우고자 일본 강성화 전략(日本强盛國化戰略)으로 급하게 우회했다. 계기가 된 건 이때 한반도에 6·25전쟁(Korea War)이 터졌다. 미국은 일본 군국의 전쟁산업기술을 지원해 한국전쟁에 후방 병참을 전담하도록 요청했다. 미국은 1950년 1월12일 미국 국무성장관 딘 에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은 한국에 이미 미군 철수를 종료한 시점에 미군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선포했다. 미군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선언은 한국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끝내 6·25전쟁이 터졌고, 일본은 “한국전쟁에 후방 병참기지(Rear Logistics Base of Korean War)”로 거듭나게 됐다.
일본입장에서 한국(6·25)전쟁은 “미국이 일본을 위해 바짝 가뭄에 때맞춰 황금 소낙비(アメリカが日本に合わせたゴ-ルデンシャワ-)”를 내려준 것 같았다. 다름도 아닌 전범국 일본제국에게 전쟁 무기를 공급하는 건 땅집고 헤엄치기였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1967) 총리는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6·25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これぞ天佑!これ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經濟を立て直せる)!”는 후일담을 남겼다.
1950년부터 1953년에는 매년 40~60%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뿐만 아니라 1973년까지 매년 10% 성장으로 10년간 400%의 GDP를 증가시켰다.
지금도 일본은 남·북전쟁(南北戰爭) 혹은 중·한전쟁(中韓戰爭)으로 일본병참기지(日本兵站基地)를 통한 전쟁경제로 제2 도약적 계기 마련해 지구촌 최강대국(first super nation)으로 거듭나고자 ‘비장의 복안(秘藏の腹案)’을 숨기고 있다.
글·그림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