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구 국채보상운동 당시
집 한채 값 맞먹는 거금 100원 쾌척
여성 참여 이끌고 전국 확산 일조
사비 들여 폐교 위기 교남학교 지원
수해 입은 성주 용암면에 제방 축조도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만세운동, 무장투쟁, 민족계몽운동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순국선열 중에는 대구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대구 출신 여걸 염농산(사진)이 대표적이다.
염농산(개명 전 염경은)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과 사설 조합 ‘달성권번’을 운영한 경영인이자 독립운동가다. 구한말 경상감영 교방의 관기(官妓) 출신으로 대구지역 최고의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경영인으로 모은 상당한 재산은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모두 바친 것으로 전해진다. 1907년 대구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일제에 짊어진 외채를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을 때 염농산은 100원을 의연금으로 쾌척했다. 당시 100원은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거금으로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7년에는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대구 교남학교를 살리기 위해 2만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했다. 항일 시인 이상화, 이육사의 출신 학교이기도 한 교남학교를 살려 민족을 위한 교육이 멈추는 것을 막고자 힘썼다. 교남학교는 현 대륜중·고의 전신이다.
염농산은 자연재해로부터 지역 안전을 지키기 위한 헌금도 했다. 1911년 경북 성주군 용암면 일대가 홍수로 큰 피해를 입자 사비를 들여 석축제방 두리방천을 축조해 홍수를 막고 새로운 농토를 확보하게 했다. 훗날 성주 용암면 주민들은 염농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에도 자세한 기록이 거의 없어 아직까지 서훈도 받지 못하고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도 등재돼있지 않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관계자는 “염농산은 기생 출신이지만 당시 지역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족적도 남겼는데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은 것 같다”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된 후 천민이 존재한 것도 아닌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용규기자 pkdrgn@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