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 봤다면 몰입하기 더 좋아
감독 “비정상적인 시대, 원칙 고수하던 인물 존중하며 촬영”
‘최악의 정치 재판’ 결과보다 중요한 건 변화하는 관객의 태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리고 한 남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대통령 암살을 돕는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영일(유성주)의 지시를 따라 대통령 암살에 가담한 중앙정보부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이다.
김 부장과 박 대령 등 8명은 대통령 암살과 국가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선다. 사건에 연루된 8명 중 박태주만 유일한 군인 신분이므로 3심제가 아닌 단 한 번의 선고로 형이 확정되는 단심제가 적용된다. 박태주의 변호는 쇼맨십이 뛰어나고 승소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정에서는 이기는 게 장땡’이라는 가치관을 지닌 정인후(조정석)가 맡게 된다.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건인 만큼 변론을 통해 출세해 볼 요량으로 재판에 참여한 정인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박태주라는 인물에 진심이 된다. 박태주의 혐의 쟁점은 그의 행동이 ‘정보 부장과 함께한 내란의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이다. 사실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기 30분 전, 박태주는 정보부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경호원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인후는 이 사실을 토대로 박태주가 ‘사형’이라는 형량을 피하고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고군분투한다.
한편 10.26을 계기로 쿠데타를 꿈꾸는 합동수사단장 전상두(유재명)는 재판을 감청하고 재판부에 실시간으로 쪽지를 건네며 재판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한다. 혼란한 재판 속에서 정인후는 박태주에게 혐의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증언을 제안하지만 박태주는 “군인은 명령을 따른다”는 원칙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재판에 임한다. 두 사람이 의견 차는 좁혀지지 못한 채 단심 재판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시대를 다뤘다. 10.26 대통령 암살 사건과 12.12 군사 반란 사태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사이에 위치한 이야기다. 영화로 보면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 사이이다. 475만, 1,3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작품들인 만큼 두 작품을 봤다면 영화 ‘행복의 나라’를 더욱 몰입할 수 있다.
故 이선균이 맡은 박태주는 10.26 사태를 주도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이었던 실존 인물 박흥주 육군 대령(1939~1980)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유재명이 연기한 전상두는 故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연상케 하는 인물로 ‘서울의 봄’에서는 황정민(전두광 역)이 연기한 바 있다.
조정석이 연기한 변호사 정인후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창작한 인물로 당시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와 주변인들의 심정과 2024년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역사적 사건보다는 나라에 짓밟히고도 기억되지 못한 개인을 조명한다.
“결국 세상은 김 부장(김재규)만 기억할 겁니다”라는 극 중 대사처럼 박흥주 대령은 미디어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도 없는 인물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천만 감독 대열에 오른 추창민 감독은 이번 영화를 연출하며 충실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그를 영화로 소환했다. 많은 것이 비정상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당연한’ 원칙과 신념을 따르려 했던 우직한 인물로 그를 표현하며 그의 신념을 존중하는 태도를 담아냈다.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 이야기를 다룬다. 10.26 사건의 실제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 여러 차례 법정에서 은밀히 쪽지가 전달돼 ‘쪽지 재판’으로 불린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겼다. 1979년 12월 4일 첫 재판 개시 이후 12월 20일, 불과 16일 만에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현역 군인 박 대령은 1심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월 6일 사형이 집행됐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5월 20일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며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영화는 인간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시대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관객들의 분노를 터트린다.
무엇보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故 이선균의 유작 중 하나로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선균은 원칙주의자 박태주를 연기하면서 인물의 우직한 면모를 깊은 눈빛으로 그려냈다. 대중이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된 만큼 마지막에 박태주로서 정인후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는 마치 이선균이 관객들에게 남기고 떠나는 한 마디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끝나고 김마스타의 ‘행복의 나라로’ 노래와 ‘우리는 이선균과 함께 했음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있으면 영화가 더욱 잔혹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조정석은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어두웠던 분위기를 환기시키다가도 스크린 가득 들어차는 붉은 눈시울과 속까지 시원해지는 발성으로 울분을 토하고 감정을 터트리면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입증한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에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면서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 낸 유재명의 존재감도 돋보인다. 머리카락을 직접 깎고 군복과 중저음의 목소리로 전상두의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서울의 봄’ 황정민과 다르게 눈빛과 입꼬리로 숨겨진 광기와 무서운 카리스마를 표현해냈다.
관객들은 역사를 통해 이미 ‘행복의 나라’ 속 정인후와 박태주의 결말을 알고 있다. 사실 영화 속 정인후와 변호인단 역시 재판의 결말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짐작하고 있다. 이처럼 관객과 정인후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이 영화에서 결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변화하게 되는 정인후와 관객들이다.
정인후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박태주의 강직함에 마음을 열고 그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혼돈의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며 스스로가 야만적인 군부시대의 비극에 저항하는 증인이 되고, 그렇게 박태주의 변호사이자 시대의 변호인이 되어간다. 관객들 역시 정인후의 변화를 보며 점차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꺼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행복의 나라’란 어떤 신념과 시대정신이 필요한 시대인지 질문이 필요한 지금이기에 ‘행복의 나라’는 지금 이 시기에 유효한 영화인지 모른다. ‘행복의 나라’의 결말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현재 진행형이지 않을까.
김민주기자 kmj@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