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보영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백정우의 줌인아웃] 보영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 백정우
  • 승인 2024.08.15 22: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제로디그리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스틸컷.

1996년 8월 중순 그러니까 28년 전 이맘 때 즈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왕가위 감독과 스태프들이 속속 도착한다.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가 머물 집이 있는 항구도시 라보카에서 시작되는 영화 ‘해피 투게더’의 크랭크인. 영화가 개봉하고 1년 뒤 제작자 재키 팽과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아휘와 보영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과 왕가위의 고민을 찾아 다시 아르헨티나로 간다.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촬영지 순례와 뒷이야기를 그린 관본량 감독의 다큐멘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이다.

영화 촬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장국영은 콘서트 때문에 홍콩으로 떠나버렸다. 왕가위에게 장국영은 다루기 힘든 칼이었다. 왕가위와 장국영의 마지막 호흡이었고 다루기 쉬운 양조위를 선택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고 양조위는 마냥 좋았을까. 양조위 역시 이구아수 폭포를 본 다음 짐도 없이 홍콩으로 탈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3주 예정이던 촬영은 지지부진했고, 1주일 내내 촬영이 없을 때도 있었으며 모두 집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국영 없는 아르헨티나에서 왕가위는 혼자 카페에 앉아 해결책을 찾았고, 그의 말대로 “해결책은 늘 최후의 순간에” 떠올랐다. 중앙반점에서 일하는 대만 청년 장첸을 등장시킨 것. 당시 군 입대를 앞둔 열일곱 살 풋내기 장첸은 이 영화로 연기 인생의 분기점을 찍는다. 당초 엔딩은 양조위가 이구아수에 도착하면서 끝나는 걸로 잡혔다, 그러나 왕가위는 양조위를 홍콩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엔딩을 바꾼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게 이유였다.

왕가위 연출 스타일이 그래왔듯이 ‘해피 투게더’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혼재했다. 양조위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판본에선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접한 뒤 아버지의 남자 애인인 장국영을 만나는 이야기. 엔딩도 양조위와 장국영 사이에 옆집 간호사를 질투의 매개로 쓰면서 양조위의 자살로 끝나는 버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국영이 촬영 도중 홍콩으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양조위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서 관숙이를 불러들여 3주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로 촬영했지만, 다른 그림이 만들어지자 관숙이 분량을 과감히 제거한다. 결국 관객이 극장에서 만난 판본은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장국영의 내레이션에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는 두 남자로 시작하고, 대만 야시장을 거쳐 어디론가 사라진 양조위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다큐멘터리에서 왕가위는 ‘해피 투게더’가 “삶의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마침표 같은 영화”였다고 술회한다. 참여한 모두에게 전환점이 된 영화였다는 뜻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는 관숙이와 양조위 신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다큐멘터리이다. 관숙이가 부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 위로 흐르는 감각적인 촬영과 쓸쓸한 정조는 압권이다.

보영과 아휘가 전쟁 같은 사랑을 나눈 라보카의 푸른 새벽과 노란색 녹색의 버스를 기억한다. 왕가위는 보영 혼자 그곳에 남겨둔 게 못내 마음에 쓰였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에 홀로 남은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백정우·영화평론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등록일 : 2023.03.17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