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박정희] (6)세계에 한류 씨앗 뿌린 새마을운동- 朴 대통령의 뒷이야기
[2024 박정희] (6)세계에 한류 씨앗 뿌린 새마을운동- 朴 대통령의 뒷이야기
  • 윤덕우
  • 승인 2024.08.2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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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신은 후손 위해 잘 사는 내 고장 만들겠다는 것”
농촌부흥운동 세 번째 시도가 ‘새마을’
농민들 마을길 넓히려 ‘땅 내놓기’ 희생
부상 요양하다 ‘새마을 노래’ 가사 창작
농작물 성공한 인물 내세워 “해 봅시다”
성과 좋은 마을에만 시멘트·철근 지원
경제발전의 원동력 된 ‘국민통합운동’
題字: 석경 이원동
題字: 석경 이원동

 

 

경남 의령군 한백산 두메산골 주민들이 1975년 새마을사업 회의를 통해 험한 산길을 뚫고 마을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경남 의령군 한백산 두메산골 주민들이 1975년 새마을사업 회의를 통해 험한 산길을 뚫고 마을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산길을 뚫고, 마을의 희망을 품다

1975년의 일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해발 400미터에 위치한 한백산 깊은 산 속 마을, 굽이굽이 좁은 길이 이어진다. 가까운 도로와는 6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호우가 내리면 흙길은 진흙탕으로 변하고,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 끊어져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없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어 교육의 기회마저 빼앗겼다.

주민들은 새마을사업 회의를 열었다. “우리 마을의 미래를 위해 길을 넓혀야 합니다!”

길을 넓히려면 험한 산을 깎아내야 했다. 200여명의 주민들이 전부 참여했다. 폭발물을 이용해 바위를 깨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흙을 나르는 작업은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여름에는 땡볕 아래서 땀을 흘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여성들도 돌을 나르며 적극 참여했다. 건장한 남자들조차 눈물을 삼키며 길을 닦아 나갔다. 새로 난 길은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농산물 판매도 활기를 띠었다. 소득이 증대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며 더욱 끈끈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농촌상황이 비슷했다. 새마을사업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농로 넓히기와 마을 안길 넓히기이다. 농로의 기준은 폭 5m, 양옆 법면 50cm씩을 뺀 폭 4m, 깊이 15cm의 시멘트 포장이었고, 농로의 명칭은 4m농로였다. 토지를 무상으로 내놓는 일이 가장 큰 희생이었다. 요즘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도로와 길 넓히기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보듯이 마을 소득증대를 위한 첫 걸음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땅이 넉넉지 못했다. 마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땅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땅이 좁아 농사짓기 힘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다면 내 땅을 내놓는 것이 무슨 아쉬움이 있겠소.”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농로를 넓히는 작업에 매달렸다. 농로 넓히기를 통해 마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부도 혼신의 힘을 다해 지원을 하였다. 새마을 운동 초기에 국내 인사뿐 아니라 원조자금을 지원하는 미국기관인 USOM(United States Operation Mission to Korea)도 경운기와 트랙터도 없는 농촌의 농로 넓히는 일에 재정투자는 낭비라며 반대가 심했다. 내무부에서는 구천서씨를 책임자로하여 농로 개설의 경제적, 사회적 효과를 나타내는 보고서를 만들어 USOM을 설득하였다. 이런 난관을 뚫고 박정희 정부는 뚝심있게 새마을운동 사업을 밀어 부쳤다.

1971년부터 1978년 사이에 전국에서 개설되거나 개선된 마을진입로와 농로는 4만3천631㎢, 마을당 길이는 1천322m이다. 농가당 13m의 마을 안길이 넓어지고 굴곡이 바로잡혔다.

정부는 마을당 2100포, 철골은 2.6t으로 무상지원했다. 정부의 강한 의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새마을운동은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나타냈다. 새마을운동은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4월 26일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 소득증대 경진대회' 치사를 위해 친필로 작성한 17쪽 분량의 메모 첫장이다. 새마을운동의 지도이념과 철학을 소상히 밝힌 이 친필메모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4월 26일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 소득증대 경진대회' 치사를 위해 친필로 작성한 17쪽 분량의 메모 첫장이다. 새마을운동의 지도이념과 철학을 소상히 밝힌 이 친필메모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진두지휘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새마을운동 교과서’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4월 26일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 소득증대 경진대회’ 치사를 위해 친필로 작성한 17쪽 분량의 메모이다. 이 친필메모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새마을운동의 지도이념과 철학을 소상히 밝힌 친필이다. 새마을사업을 추진방법, 새마을지도자 양성방식은 물론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진두지휘 아래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애쓴 사람들은 관계 부처, 각 시도 등에 걸쳐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72년 박정희대통령 새마을운동관련 국무회의 하는 모습(사진제공-1972년 대통령비서실 발행한 새마을 화보집에서 발췌)
1972년 박정희대통령 새마을운동관련 국무회의 하는 모습(사진제공-1972년 대통령비서실 발행한 새마을 화보집에서 발췌)

 

그중에서도 박진환(朴振煥) 대통령특별보좌관과 김준(金準)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의 공헌은 지대하다. 김준 원장이 과로로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준 원장이 쓰러지면 새마을운동에 큰 차질이 온다면서 남몰래 보약(補藥)을 보내 준 일도 있었다. 김현옥(金玄玉), 홍성철(洪性澈), 박경원(朴璟遠) 씨 등 세 내무부 장관으로 하여금 새마을운동이 정착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새마을운동 홍보와 전개에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신 김정렴(金正濂) 대통령비서실장, 박진환(朴振煥) 대통령특별보좌관, 김수학(金壽鶴) 경상북도지사, 고병우 재무부 재정차관보, 새마을운동 선구자와 관계자 등이 쓴 글과 회고록, 서신 등에 기록된 내용 중 새마을운동 성공을 위해 불굴의 정신으로 일한 박정희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췌하여 알리고자 한다.

먼저 박진환(朴振煥) 대통령특별보좌관은 그의 저서(경제발전과 농촌경제, 1987년, 박영사)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회고하기를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부흥을 이룩해 보려는 그의 세 번째 시도였다고 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세 번째 것은 그런대로 성공했다고 회상하였다. 그 첫 번째의 시도는 5·16 군사혁명 직후에 있었던 재건국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노렸던 궁극적 목표도 농어민들의 자조 정신을 높이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재건국민운동의 이념이나 신조는 새마을운동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1968년도에 실시한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이었다. 이 특별사업은 전국 각지에 비닐하우스, 양잠, 양송이, 과실, 담배, 연안 양식, 비육우 등의 주생산지를 조성하는데, 정부가 참여하는 것이었다. 전국 여러 곳에 조성한 주생산지마다 일련번호가 매겨졌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일련번호별로 주산지 조성사업 하나하나 점검하기까지 하였다. 소득증대 특별사업에는 비록 전체 농어민 중의 일부가 참여한 데 지나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로 시도하게 된 새마을운동 발상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음 두 가지에 관하여 확신을 얻게 되었다. 즉 이제는 군(郡) 행정이나 면(面) 행정의 공무원들이 농촌개발사업을 주도할 수 있게 훈련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개발을 위한 정부 사업에는 농어민들의 근면· 자조·협동의 정신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새마을 노래 창작 스토리를 전해 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971년 가을, 목욕 중 미끄러져 우흉부에 충격을 받아 늑골 두 개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공식행사를 중단했다. 아침과 저녁 1회씩 중요한 국정에 관한 비서실장의 보고만을 받으며 치료와 요양하였다. 어느 날 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고취하기 위하여 새마을사업을 할 때 남녀노소 마을주민들이 함께 즐겨 부를 노래를 하나 작사했다”고 했다. 가사가 적혀 있는 종이를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건넸다. 작곡 권위자인 홍연택(洪燕澤) 국립교향악단장이 작곡하고, 작사 글은 이은상에 의해 감수를 받았다. 당대 최고 문호 이은상 선생의 감수평이 유명했다.

“ 한 자 한 획도 손 댈 데가 없다. 국가원수의 철학과 신념이 배어 있는 글이다.”

육군국악대와 둘째 딸 근영(槿瑛) 등이 참여하여 1972년 4월 21일 “새마을 노래”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새마을 운동의 실질적인 효시는 1968년부터 추진한 ‘제1차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상징처럼 된 이 사진은 1969년 9월18일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전국경진대회에서 하사용씨의 사례를 듣고 감명을 받은 박대통령이 하사용씨 가르키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다. 하사용씨는 당시 머슴살이 7년으로 돈을 모아 비닐하우스 농작물을 길러 부자가 된 성공사례로 새마을운동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 성공하지 않습니까? "하면된다! 국민 여러분,우리모두 해 봅시다!"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할 수 있다'의 새마을정신,'CAN DO Spirit'이 여기서 시작됐다. 올해로 만93세인 하수용씨는 현재 충북 청주에 살고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상징처럼 된 이 사진은 1969년 9월18일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전국경진대회에서 하사용씨의 사례를 듣고 감명을 받은 박대통령이 하사용씨를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다. 하사용씨는 당시 머슴살이 7년으로 돈을 모아 비닐하우스 농작물을 길러 부자가 된 성공사례로 새마을운동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 성공하지 않습니까? "하면된다! 국민 여러분,우리모두 해 봅시다!"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할 수 있다'의 새마을정신, 'CAN DO Spirit'이 여기서 시작됐다. 올해로 만93세인 하사용씨는 현재 충북 청주에 살고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상징처럼 된 사진이 있다. 1969년 9월 18일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전국경진대회였다.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충청북도 대표로 나온 하사용씨 사례였다. 머슴 7년 생활로 돈을 모아 비닐하우스 농작물을 길러 부자가 된 성공사례였다. 눈물로 장내가 숙연해 졌다.

단상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원고를 꺼들떠 보지도 않고, 손을 번쩍들어 하사용 씨 쪽을 가리켰다.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 성공하지 않습니까? 하면된다! 국민 여러분,우리모두 해 봅시다!”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할 수 있다’의 새마을정신,‘CAN DO SPIRIT’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이다. 참여 농민이 스스로 10~20% 자기 돈을 투입하도록 하라는 원칙도 이때 세워졌다.

월간경제 동향 보고 회의에서 국무위원 전원과 여당인 공화당 간부들이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듣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새마을운동에 관한 교육을 했다. 1971년 6월부터 2명의 농어민이 선발되어 새마을 성공사례를 발표하게 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도 가끔 발표하게 하였다. 발표가 끝난 다음 발표자는 새마을훈장을 받고, 대통령은 그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며 숙원사업 지원을 약속하고 격려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시찰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마을운동 현장을 찾았다. 아무리 심기가 불편한 때에도 새마을운동이 잘 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을 때에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은 말한다.

◇새마을운동에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

새마을운동 초기에 일이다. 새마을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날 때 여당인 공화당은 새마을지도자에게 당원 가입을 권하는 안이 검토된 바 있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농어민들에게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일깨워 농민이 잘살고 마을을 잘 살게 하며, 나라가 잘되게 하는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되어야 한다. 과거부터 공화당 당원이던 사람 중 새마을지도자로 뽑힌 경우 공화당을 탈당하라고 할 수 없으나 단 사람이라도 새마을지도자를 새로운 당원으로 가입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청와대비서실에는 이 점이 잘 지켜지는지를 항상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보다 좀 앞서 청와대비서관 중 한 사람이 마련한 청소년문제에 대한 연구건의서 중 농어촌지역에 있어서는 4H클럽운동을 지원하고 이들 회원을 여당인 공화당 청년당원으로 가입시키는 안을 제출한 바 있었다. 이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건의안 표지에 붉은 글씨로 “4H클럽운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지원은 계속하되 절대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고, 이 지시를 관계기관에도 주지시키도록 했다.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지켜졌다.

박정희대통령이 1972년3월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새마을운동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사진제공-국가기록원)
박정희대통령이 1972년3월24일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새마을운동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사진제공-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 우수마을 우선지원 원칙 천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관련하여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첫해에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 마을에만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 배분해 주는 지원 계획을 세웠다. 지시를 받은 내무부가 제외된 마을 사람들이 반발이 클 것이라고 난색을 보였다. 이 방침을 전해 들은 여당에서는 대경실색했다. 다음 선거 때 공화당이 망할지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의 재고를 여러 차례 요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노력하고 협동하는 마을은 적극적으로 돕되 노력하지 않거나 협동하지 않는 마을은 돕지 않겠다. 이 길만이 수천 년 내려온 의타심을 뿌리 뽑고 자조하는 정신을 자각시키는 길이다. 이와 같은 방침으로 설령 선거 때 표를 못 얻어서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만은 바꾸지 않겠다”라고 강조했다.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방침이 백번 옳지만, 지원대상에서 빠진 마을이 계속해서 빠지면 정치적으로 큰 일이라고 내심 불안한 마음을 씻기 어려웠다”라고 회고록에 기술하고 있다. 이때 농어민들의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다. 지원대상에서 빠진 마을 중에는 자진해서 자력으로 새마을사업에 참여한 마을이 3분의 1 이상인 6천1백8개나 되었다. 이 마을들은 하등 불평 없이 첫해의 미진함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는 다짐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농어민들이 얼마나 훌륭하냐! 나의 진실을 이렇게 알아주다니!”라 하면서 “농어민들이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우리 마을을 잘 살게 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잘 인식한 점에 큰 감명을 받았다”라고 덧붙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근면·자조·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먼저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웠다. 마을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1972년 5월 18일 광주 새마을소득증대 촉진대회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호텔숙소에 머물면서 새마을 노래 제4절도 이때 탄생했다. 68년 청와대 기습사건과 69년 KAL(YS-11)사건을 비롯 거의 매달 벌어지는 북한 공비침투사건이 있는 시대였다.

‘우리 모두 굳세게 땀흘려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이 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의 행동철학”이라 선포했다. “우리가 오늘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일을 위해, 사랑하는 후손을 위해서 잘 사는 고장, 번영된 조국을 만들겠다는 데에 더 큰 뜻이 있는 것”임을 역설했다. “후세에 자손들이 너의 조상은 무엇을 한 분이었느냐고 물음을 받았을 때 나의 조상은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 할 수 있게 합시다”라고 절규에 가까운 명연설을 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침체와 가난 속에 수천 년을 시달려 온 우리 농어촌을 ‘잘 사는 마을’, ‘자립농어촌’으로 육성했다. 전국의 농어촌을 생기와 의욕에 찬 마을로 바꾸어 놓았다. ‘노력하면 우리도 잘살 수 있다’라는 값진 교훈을 우리 농어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온 국민도 근면·자조·협동의 기운이 이룩해 놓은 성장의 의미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간에 걸친 치적 중에는 비난을 받을 것도 물론 있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룩해 놓은 그 많은 업적 중 “잘사는 농어민, 잘 사는 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새마을운동을 창시했고,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마침내는 온 세계가 우러러보는 성과를 거둔 대통령이었다”라고 평가를 들을 때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도 가장 좋아할 것으로 생각한다.

처음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잘살기 운동의 목표는 ‘1980년대 국민소득 1천 달러, 수출 100억 달러’였다. 1972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40달러였다. 당시로서는 1980년대 목표가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3년 앞당겨 목표를 실현했다. 2023년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405.1 만원으로 미 달러화기준 3만 3745달러가 되었다. 1인당 GDP 순위는 34,653만 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32위이다. 북한과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세계 11대 강국이며 군사력 순위는 세계 6위이다.

1976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찾아 연수생들을 격려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사진제공-국가기록원)
1976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찾아 연수생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사진제공-국가기록원)

 

새마을운동은 무엇보다 자발적 운동이었다. 국민 스스로가 참여하는 ‘국민통합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 결집 된 힘이 솟아났다. 그 힘이 바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만든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리더십이 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친필원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이 새마을운동 정신이다. 이 정신이 있어야만 새마을운동은 성공한다.

당장 오늘의 우리가 잘살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서 잘 사는 내 고장을 만들겠다는데 보다 더 큰 뜻이 있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정신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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