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년입니다] 심재신 ‘내마음은 콩밭’ 대표 “뇌전증 환자들 연대 강화하고 사회적 편견 바로 잡고파”
[나는 청년입니다] 심재신 ‘내마음은 콩밭’ 대표 “뇌전증 환자들 연대 강화하고 사회적 편견 바로 잡고파”
  • 윤덕우
  • 승인 2024.09.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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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서 극적 소재로 연출
불치병 아니며 약물 치료 가능
사회생활 가능하고 유전 안돼
우연히 만난 비영리단체 대표
뇌전증 환자로 자조 모임 주도
환자 커뮤니티 공동 운영 나서
잡지 만들고 인식 개선 캠페인
 
에필랩시즌1 성과공유회
2024년 2월, 대구 북성로 대회의장에서 열린 ‘뇌전증 생활실험실, 번쩍번쩍 에필랩 시즌1 성과공유회’를 마친 뒤 찍은 단체사진(앞줄 맨오른쪽이 심재신 대표. 뇌전증 환자 및 가족, 관심있는 시민들이 리빙랩 활동에 참여하여 뇌전증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아는 만큼에서 비롯되는 관심의 범위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이후 ‘아만보’라는 줄임말로 인터넷에서 유행하며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역사를 포함한 사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해야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이 말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의 지식과 정보의 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요즘 청년들은 표준화된 교실과 아파트에서 자라면서 이전 세대가 정의한 성공 기준에 맞추려 전력 질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소외를 초래하며, 주변을 돌아보거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시간조차 부족하게 만든다. 결국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심이 점점 줄어들면서, ‘내 알바 아님(알빠노)’이라는 냉소적인 문화 또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인의 무관심과 냉소가 확산하면서, 결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번져가는 상황이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관심은 더 많은 문제를 낳고,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대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 디자이너 심재신 대표는 2019년부터 ‘뇌전증’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심 대표는 ‘아는 만큼’에서 사회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저는 남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닌,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제 사회적 역할과 인생의 방향성을 찾았습니다. 뇌전증은 제가 잘 아는 질환이기에, 제가 겪었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이 질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배려도 늘어날 것이라 믿으며, 인식 개선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뇌전증에 대한 오해

뇌전증은 수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치료법을 제시할 정도로 오래된 질환으로, 뇌신경세포의 일시적인 전기 신호 이상으로 발생한다. 역사적으로 도스토옙스키, 나폴레옹, 차이콥스키 같은 위대한 인물들도 뇌전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 질환은 오랫동안 불치병이나 귀신이 들린 병으로 간주되어 심각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받아왔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 ‘간질’로 불리던 이 병의 명칭이 ‘뇌전증’으로 변경된 것이다.

뇌전증은 뇌졸중과 치매에 이어 세 번째로 흔한 신경계 질환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 5천만 명의 환자가 있으며, 뇌전증의 평생 유병률은 인구 1,000명당 7.6명에 이른다. 대략 70%의 환자들은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뇌전증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극적인 연출의 소재로 사용되며, 이로 인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발작하는 장면이 공포스럽게 그려지거나, 병을 앓는 인물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뇌전증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뇌전증은 불치병이 아니며, 약물치료나 수술로 충분히 관리하고 치료할 수 있는 병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환자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유전을 걱정하거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병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심재신 대표는 인식개선 활동을 이어나가는 매 순간 정성을 다해 힘주어 말한다. “뇌전증은 불치병이 아닙니다.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질환입니다. 뇌전증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아야 환자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자신의 질환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에자이와 ‘생활 실험’ 추진
환자 경험 공유·문제 대안 제시
올 4월 시즌1 끝, 곧 시즌2 시작
발작 빈도·발생 시간 기록 중요
日 기업 요청, 앱 ‘나나카라’ 개발
현지 뇌전증 소아가정 35% 사용
전세계 환자 커뮤니티 연결 희망

◇운명적 만남이 이끈 커뮤니티의 확장

심 대표는 대학에서 국어 교육을 전공하던 중, 교직이수 과정에서 들었던 특수교육학 수업이 다양한 장애 당사자와 가족들을 만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 수업 덕분에 그는 장애 당사자 및 가족들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을 펼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질환을 경험한 활동가와의 만남이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만남을 통해 심 대표는 뇌전증 인식개선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활동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심 대표는 친척이 경영하는 일본 교육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한국과 일본 간의 공통점과 문제 해결 방식을 배웠다. 이후 대구 지역에서 청년문화기획 단체를 운영하던 중, 우연히 비영리 단체 ‘별을 만드는 사람들’의 심규보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심 대표 또한 자신과 같이 뇌전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더 나아가, 심 대표가 이미 뇌전증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자조 모임을 이끌어 오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2019년 4월, ‘따뜻한 시선’이라는 커뮤니티를 함께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거창하지 않았다. 지역 사회에서 시작된 작은 실천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공통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조 모임, 뇌전증 인식 개선을 위한 동성로 거리 캠페인, 그리고 뇌전증 환자의 삶을 담은 매거진 ‘따뜻한 파도’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 지역에는 모임이 없나요?’라는 문의가 많아졌고, 이에 부응해 각 지역별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가 ‘퍼플라이저(purplizer)’를 양성하는 프로젝트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에자이 주식회사와 협력하여 뇌전증이 있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뇌전증 생활 실험실 ‘번쩍번쩍 에필랩’을 동료들과 함께 추진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따뜻한 시선’에서 만난 환자 당사자 및 가족들과 함께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사회적 문제와 인식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두가 뇌전증을 친숙하게 여기는 전문가로서, 프로토타입의 초안을 완성할 수 있었다. 20명의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시즌 1(2023.12.~2024.04.)’이 마무리되었고, 곧 시작될 ‘시즌 2’를 통해 프로토타입이 더욱 정교화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뇌전증 질환을 앓고 있는 타인을 실제로 만난 것은 심규보 대표님이 처음이었어요. 남들에게 굳이 말해야 하는 질병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약만 복용하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뇌전증 환자들은 대부분이 그래요. 그래서 당사자들 간의 만남이 시작부터 쉽지 않죠. 그런데 자조모임 형태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니, 지역 기반 커뮤니티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더라고요. 물론 온라인 기반으로 느슨한 연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감동적인 스토리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티가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확신과 믿음을 만들어줬거든요.”

◇뇌전증 환우를 향한 진심을 담아 활동영역을 확장하다

뇌전증은 질환의 특성상 발작의 빈도, 강도, 발생 시간, 그리고 발작을 유발한 요인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기록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기록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존에 국내에 출시되었다가 서비스가 중단된 뇌전증 다이어리(발작 기록) 앱들은 공급자 중심으로 서비스가 구축되어 사용자 편의성이 떨어졌고, 커뮤니티 확장성도 제한적이었다.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요구해 왔다. 특히, 지역 간 의료 격차와 진료를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 그리고 뇌전증 진단 전후에 발작 및 약물 복용 데이터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자이 주식회사의 소개로 일본의 IT 스타트업 녹온더도어(KOD)를 만나게 되었고, KOD는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뇌전증 발작 기록 앱 ‘나나카라(nanacara)’를 개발했다. 이 앱은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의 생활과 의견을 반영하여 만들어졌으며, 현재 일본에서 약물 난치성 뇌전증을 앓는 소아 가정의 약 35%가 사용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한국 PM으로 참여한 심 대표는 특히 약물 난치성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가족들에게 이 앱이 유용한 도구가 되길 바라고 있다. 그는 “이 앱은 단순한 기록 도구를 넘어, 의사와의 실시간 질의응답 기능을 통해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고, 커뮤니티 기반의 연대를 강화하는 솔루션이 될 것입니다”라며, “이 앱을 통해 전 세계의 뇌전증 환자 커뮤니티가 연결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

심재신 대표는 ‘커뮤니티 디자인’의 가치를 통해 뇌전증이라는 질환을 매개로 유사한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는 ‘내 인생에서 뇌전증은 큰 바위가 아닌 계란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심 대표는 환자와 가족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통해 돕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미나 (청년활동연구가/ 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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