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을 보러 가기 힘든 뜨거운 여름이었다. 한낮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어둠이 내릴 때 연꽃을 보러 갔다. 구름을 담은 연못 속에 연꽃은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듯 했다.
노을 지는 연못 풍경을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가 “어” 하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쿠라피아(일명 겹물망초)가 토끼풀처럼 못 둑을 뒤덮고 있었다. 꽃집에서조차 보기 힘든 쿠라피아를 우연히 한국의 길가에서 만나다니 반가웠다.
‘저 정도로 빽빽하게 퍼지려면 올봄에 심은 것은 아니야.’
꽃잔디나 맥문동 같은 지피식물은 심은 후 1년은 지나야 다른 풀이 올라오지 못하게 지면을 피복할 수 있다. 아무리 번식력이 잔디보다 뛰어난 쿠라피아라고 하지만 저렇게 자연스럽게 번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노지에서 월동을 하지 않고서야 저렇게 못 둑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쿠라피아는 단추 크기의 수수한 연보라색 꽃과 흰색 두 종이다. 꽃의 수수함은 물론이거니와 번식력이 상당히 좋아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었던 지피식물이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쿠파리아는 식물신품종관리법에 의해 허가받은 원예업자만이 재배하여 보급할 수 있는 종이다. 그만큼 유통이 제한적이다.
작년 여름 괭이밥이 무성하게 자라는 뒷마당에 쿠라피아를 심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삼덩굴이 집 울타리를 뒤덮어 넘어오는 것을 조선호박을 심어 막은 것과 비슷한 맞불 작전이다. 한삼덩굴은 덩굴 특유의 뻗는 힘이 대단하기는 하나 호박 줄기를 따라 감아가면서 울타리로 넘어오는 것이 많이 줄었다. 쿠라피아가 조선호박처럼 스크럼을 짜서 괭이밥의 행진을 막아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쿠라피아를 알아보던 중에 노지월동이 안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 내가 쿠라피아를 처음 본 곳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니까 따뜻한 곳에서 살거야’라고 생각을 하고 단념을 했다. 그런데, 쿠라피아가 경산의 저수지에서 겨울을 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겨울철 못 둑 위에 서 보면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안다. 사람도 이겨내기 힘든 겨울 바람을 쿠라피아가 이겨냈다는 것이다.
지난겨울 우리 집 마당에서 첫 겨울을 보낸 능소화를 보면 식물의 겨울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해 여름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그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손바닥만한 능소화를 마당에 심었다. 가을이 지나고 매서운 바람이 시작되니 능소화가 걱정이 되었다. 능소화는 잎들을 다 떠나보내고 말라비틀어진 줄기로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죽은 것 같아 마른 줄기를 뜯어보고 싶었지만 탈수된 줄기를 비틀다가는 능소화를 죽일 판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으스러질 것 같아 보온재를 감싸 줄 수도 없고 그냥 쳐다보며 부디 겨울을 이겨내기만을 빌었다.
그러다 봄을 맞았고 능소화는 여전히 앙상한 줄기에 잎이 없었다. ‘아, 죽었구나’ 생각을 하며언제 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미루다가 능소화를 캐려고 가보니 손톱만한 잎을 틔우기 시작했다. 춥다고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혼자 겨울을 이긴 어린 능소화가 대단했다. 토종 능소화조차도 겨울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데 중남미가 고향인 쿠라피아는 칼바람이 부는 황량한 못 둑에서 어떻게 겨울을 이겨냈을까? 혹시 월동을 위한 보온재를 시청에서 깔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토끼풀을 위해 보온재를 까는 일이 없듯이 쿠라피아를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갑자기 쿠라피아가 어떻게 월동을 할까 궁금했다. 한겨울에 저수지를 자주 찾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직접 노지에 쿠라피아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저수지 주변과 우리 집 마당 두 곳에 월동이 된다면 더 일반적으로 월동이 가능한 일이니까.’
버려진 스티로폼 박스에다가 쿠라피아 삽목을 했다. 다행히 뜨거운 여름을 잘 버텨주고 있다.노지로 옮겨 심을 예정이었는데 아직까지 기온이 너무 높아 삽목통에 그대로 두고 있다. 올 여름같은 무더위는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내년 봄이 오면 더위와 겨울을 이겨낸 쿠라피아가 여기저기서 “손병철이”하며 나를 불러줄 것 같다. 마치 나의 친구처럼.
손병철 (대구시교육청 장학관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대변인)
노을 지는 연못 풍경을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가 “어” 하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쿠라피아(일명 겹물망초)가 토끼풀처럼 못 둑을 뒤덮고 있었다. 꽃집에서조차 보기 힘든 쿠라피아를 우연히 한국의 길가에서 만나다니 반가웠다.
‘저 정도로 빽빽하게 퍼지려면 올봄에 심은 것은 아니야.’
꽃잔디나 맥문동 같은 지피식물은 심은 후 1년은 지나야 다른 풀이 올라오지 못하게 지면을 피복할 수 있다. 아무리 번식력이 잔디보다 뛰어난 쿠라피아라고 하지만 저렇게 자연스럽게 번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노지에서 월동을 하지 않고서야 저렇게 못 둑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쿠라피아는 단추 크기의 수수한 연보라색 꽃과 흰색 두 종이다. 꽃의 수수함은 물론이거니와 번식력이 상당히 좋아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었던 지피식물이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쿠파리아는 식물신품종관리법에 의해 허가받은 원예업자만이 재배하여 보급할 수 있는 종이다. 그만큼 유통이 제한적이다.
작년 여름 괭이밥이 무성하게 자라는 뒷마당에 쿠라피아를 심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삼덩굴이 집 울타리를 뒤덮어 넘어오는 것을 조선호박을 심어 막은 것과 비슷한 맞불 작전이다. 한삼덩굴은 덩굴 특유의 뻗는 힘이 대단하기는 하나 호박 줄기를 따라 감아가면서 울타리로 넘어오는 것이 많이 줄었다. 쿠라피아가 조선호박처럼 스크럼을 짜서 괭이밥의 행진을 막아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쿠라피아를 알아보던 중에 노지월동이 안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 내가 쿠라피아를 처음 본 곳이 이집트에 있었을 때니까 따뜻한 곳에서 살거야’라고 생각을 하고 단념을 했다. 그런데, 쿠라피아가 경산의 저수지에서 겨울을 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겨울철 못 둑 위에 서 보면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안다. 사람도 이겨내기 힘든 겨울 바람을 쿠라피아가 이겨냈다는 것이다.
지난겨울 우리 집 마당에서 첫 겨울을 보낸 능소화를 보면 식물의 겨울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해 여름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그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손바닥만한 능소화를 마당에 심었다. 가을이 지나고 매서운 바람이 시작되니 능소화가 걱정이 되었다. 능소화는 잎들을 다 떠나보내고 말라비틀어진 줄기로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죽은 것 같아 마른 줄기를 뜯어보고 싶었지만 탈수된 줄기를 비틀다가는 능소화를 죽일 판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으스러질 것 같아 보온재를 감싸 줄 수도 없고 그냥 쳐다보며 부디 겨울을 이겨내기만을 빌었다.
그러다 봄을 맞았고 능소화는 여전히 앙상한 줄기에 잎이 없었다. ‘아, 죽었구나’ 생각을 하며언제 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미루다가 능소화를 캐려고 가보니 손톱만한 잎을 틔우기 시작했다. 춥다고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혼자 겨울을 이긴 어린 능소화가 대단했다. 토종 능소화조차도 겨울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데 중남미가 고향인 쿠라피아는 칼바람이 부는 황량한 못 둑에서 어떻게 겨울을 이겨냈을까? 혹시 월동을 위한 보온재를 시청에서 깔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토끼풀을 위해 보온재를 까는 일이 없듯이 쿠라피아를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갑자기 쿠라피아가 어떻게 월동을 할까 궁금했다. 한겨울에 저수지를 자주 찾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직접 노지에 쿠라피아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저수지 주변과 우리 집 마당 두 곳에 월동이 된다면 더 일반적으로 월동이 가능한 일이니까.’
버려진 스티로폼 박스에다가 쿠라피아 삽목을 했다. 다행히 뜨거운 여름을 잘 버텨주고 있다.노지로 옮겨 심을 예정이었는데 아직까지 기온이 너무 높아 삽목통에 그대로 두고 있다. 올 여름같은 무더위는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내년 봄이 오면 더위와 겨울을 이겨낸 쿠라피아가 여기저기서 “손병철이”하며 나를 불러줄 것 같다. 마치 나의 친구처럼.
손병철 (대구시교육청 장학관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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