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6· 3운동 공로로 민주유공자 된 김재현
<대구논단> 6· 3운동 공로로 민주유공자 된 김재현
  • 승인 2009.03.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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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대기자)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대부분 대학생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일제 강점기 하에서의 독립운동은 당시의 실상에 맞게 중학생들이 앞장섰다. 중학생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고등학생일뿐더러 늦게 입학한 사람이 많아 나이들도 많았다. 이들이 선두에서 이끌면 수많은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일반인들은 중학생들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3·1만세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유관순 같은 애국열사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이어진 6· 10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 등도 모두 이들 중학생들의 주도로 이뤄진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광복 후에는 치열한 좌우학생운동을 통해서 찬 반탁 운동으로 번졌고 드디어 자유당의 단말마적인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궐기로 4.19혁명을 성취해 냈다.

학생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쫓아내는 쾌거를 이룩했으나 1년 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민주당 정권은 무너졌다.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군부정권은 오직 힘만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국제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고자 한일협약을 시도하게 된다. 광복이후 미군정 3년을 거치고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은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가장 먼 나라로 생각되는 일본과의 수교를 위한 여러 차례의 회담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36년간의 지배와 민족탄압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이승만정부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시큰둥한 반응만을 보이며 질질 끌고 나갔다. 한국의 국민감정도 배일(排日) 일변도여서 정부로서도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게다가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일약 경제적인 부흥을 이뤘고 전쟁을 치른 한국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여서 양국의 수교에 대한 자세는 전혀 달랐다.

다만 양국의 후원자격인 미국만이 이들의 강화(講和)를 재촉하는 입장이었다. 때마침 군부정권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할 호기를 얻은 미국은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특히 존 F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된 후 승계한 린든 존슨은 1964년 이후 소강상태에 빠진 한일회담의 재개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 1964년 이후라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이른바 6· 3사태를 의미한다.

6· 3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맺고자하는 일본과의 수교협약이 굴욕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작했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상대국과의 외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외교적으로 능소능대한 외교관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확고한 위상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 때 이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김종필이다.

김종필은 5.16의 주역으로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공화당 의장으로서 대통령 다음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가 한일협약에 임하여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는 보도가 떠돌아 지금까지도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에 속한다. 그가 한일회담을 매듭짓기 위해서 일본으로 떠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반대하는 데모를 감행한다.

3만 명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정부는 국가전복기도 반란사건으로 규정하고 1964년 6월3일 오후6시30분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시위금지는 물론이고 언론검열과 대학휴교가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학생 정치인 언론인들이 검거되어 무려 1120명이 내란 및 소요죄로 처벌받는다. 이를 계기로 한일회담은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피면 `64년 중국과 프랑스가 국교를 수립하고 그 해 8월에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본격적으로 월남 전쟁에 개입하는 단초를 연다. 게다가 10월16일에는 중국이 핵실험을 단행하여 세계를 경악시킨다. 이러한 국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미국은 한일 두 나라가 과거를 청산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중단된 한일회담이 재개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결국 14년간 질질 끌기만 하던 한일회담은 6· 3운동이 벌어진 다음 해 7차 회담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역사적인 국교정상화를 이룩한다. 이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대학생들은 `64년11월3일 학생의 날에 명동 흥사단강당 대성빌딩에서 6·3동지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이명박을 선출한다. 현재 회장은 박정훈이다. 이들은 군사정권 하에서 6· 3운동의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뒷전에 밀려왔다.

그러나 이번에 법이 개정되어 6· 3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기로 하고 첫 번째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당시 중앙대학교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서울 강서구청장 김재현이 인증서를 받기에 이르렀다. 6·3운동이 4.3사건, 삼청교육, 동의대사건도 진즉 명예회복이 된 것에 비하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국가의 인증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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