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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신의 한 수(手)를 들자

기사전송 2017-12-25, 20: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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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야윈 등을 떠밀어내며 이별을 준비하던 11월도 잠시, 미처 추스를 새도 없이 한 장 덩그러니 남은 12월을 마주하며 가슴 덜컹하던 기억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이미 지나온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거니와 문신처럼 지워지지도 않는다. 딱히 한 일도 이루어놓은 것도 없이 어영부영하던 차에 12월은 그렇게 저만의 속도로 폭풍 질주를 하고 있다.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날이면 재래시장을 찾아 가거나 서점을 들르기도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소원했던 친구를 불러내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면 한 잔 더 리필을 해 주는 찻집이 있다. 주식인 밥 한 공기보다 기호식품인 한 잔의 찻값이 더 부담스러운 우리들의 아지터가 되어주는 곳, 원하는 만큼 무료로 리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더해져 맘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다.

미처 챙기지 못해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부족했던 것들을 좀 더 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 하다가도 거추장스럽고 버거운 것들을 다 정리하고 적게 가짐으로써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도 실천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따라 붙을 때도 있다. 리필이란 말이 있다. 다시 채운다는 뜻이다. 이미 다 써버린 한 해, 그리고 달랑 한 장 남은 12월, 누가 한 해를 다시 리필해주는 선물은 없을까 되돌아본다.

빡빡 숙제처럼 무수한 계획들로 빼곡히 채웠던 달력의 첫 장들, 가슴 뛰던 남편과의 첫 만남, 핏덩이의 아이가 세상을 향해 두드리던 감동의 첫 울음, 나중에 돈 많이 벌어 효도해야지 다짐만 하다 놓쳐버린 부모님의 든든했던 그늘까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다시 채우듯 리필 할 수 있다면. 살다보니 12월은 늘 그랬던 것처럼 후회와 아쉬운 것들을 눈물처럼 글썽글썽 매단 채 끝나가고 있다.

세월이란 것이 그처럼 소진되거나 닳거나 써버리고 마는 것들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이 그저 기계적으로만 흘러간다면 삶이 또한 얼마나 비참할까. 행복해질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삶 또한 얼마든지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리필의 조건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야말로 척박한 삶을 지금까지 잘 견뎌내게 한 힘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 삶을 리필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얼마나 쌓았는가 뒤적여 본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조금 줄인 것, 1포인트, 피곤한 남편에게 바가지 덜 긁은 것, 1포인트, 하루가 힘든 길냥이에게 때를 놓치지 않고 집사 노릇 잘 한 것, 1포인트, 내 자신의 일보다 남의 맘부터 살피려 노력한 것, 1포인트, 주부로서, 학생으로서, 글쟁이로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노라 자신에게 후하게, 1포인트. 일단 5포인트 적립을 했다. 이젠 리필 할 차례다.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국 시인의 ‘리필’이란 시를 나에게 들려주며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12월을 생각한다.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듯, 한 올씩 힘겨웠던 것들을 정리하고 방전된 배터리를 갈듯, 다음 한 해를 리필 하는 심정으로 노트를 펴고 계획을 적는다. 불현 듯, 마지막 남은 인생의 달력에는 어떤 계획을 기록할까? 볼펜을 빙빙 돌리며 한참동안 생각에 젖는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쓴 버나드 쇼보다 긍정적인 철학자 칸트처럼 ‘이만하면 됐다.’라고 묘비명을 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더 이상 미적대지 말고 당당하게 머뭇거리지 말고, 단 한 장, 단 하루의 시간이 남았을지라도 손들어 외쳐 보자. 내일은 누릴 수 없는 날일지도 모르니 남은 생을 위하여, 그리고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삶을 위하여 마지막 신의 한 수(手)를 들자.

“여기 리필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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