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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아버지와 딸

기사전송 2018-05-15, 2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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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자전거가 지나간다. 아이를 뒤에 태운 아버지는 바람을 막아내며 신나게 달린다. 짧은 양팔을 벌려 아버지의 옷깃을 꽉 잡은 아이는 아버지의 등 뒤에 기댄 채 호기심 어린 말들을 끝없이 쏟아낸다. 자전거 바퀴도 따라 돌아간다. 재잘 재잘······.

 미카엘 두독 데 비트(Michael Dudok De Wit)의 흑백 애니메이션 (Father and Daughter)을 보면 아버지가 딸을 태우고 둑길을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와 딸은 삶의 끝에서 만나는 존재일까. 아버지의 자전거를 탄 딸은 아버지의 등에서 느꼈던 따뜻한 온기를 잊을 수 없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를 짐자전거 뒷자리에 앉히고 다니기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유별나게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아버지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는 질문을 해댔지만 같은 질문을 몇 번씩이나 다시 물어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 주셨다고 한다.
 어린 날의 호기심과 낯선 두려움들을 그렇게 아버지의 등 뒤에서 삶의 길을 찾고 해답을 얻었을 것이다. 등 뒤에 앉은 내게 행여나 찬바람이 불까봐 연신 몸을 움직여 막아냈을 것이다. 문득 그 때의 아버지 등이 그리워진다.
 뒤늦은 나이에 컴퓨터 앞에 처음으로 앉았던 때가 떠오른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옛 속담처럼 컴맹이었던 나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 앞에 선 듯 가슴이 뛰고 두려웠다.
 이 나이에 내가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기계치인 내게.  
 첫 부팅을 하고 살얼음위에 첫발을 내디디듯 조심스레 한자 한자 독수리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려 본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어 놓지도 못한 채 대수롭지 않은 장애물에 걸려 주저앉기 일쑤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떼를 쓸 수도 없고 서푼어치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아이에게 묻지도 못한 채, 휴대폰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들의 주변을 맴돌며 눈치를 살폈다.

 폰 속에서 답을 찾은 아이가 잠깐 쉬는 틈을 타 말을 걸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환하게 빛나던 아이의 눈빛이 사그라진다.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안으로 삭이며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말을 건내 본다. 아이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럽다.

 ‘불치하문’은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보다 의문이 있으면 당당하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신뢰가 가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가르쳐주어도 금세 잊어버리고 거듭 물어오는 엄마가 답답한 듯 아이의 표정엔 짜증이 섞여있다.
 “엄마는 왜 자꾸 똑같은걸 물어요. 도대체 몇 번을 가르쳐 줘야 하나요. 엄마.”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달아나는 기억과 침침해지는 노안 때문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생전 휴대폰을 새로 사셨던 아버지가 오버랩 된다.
 “큰딸, 눈도 잘 안보이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답답해 죽겠다.”시며 가르쳐 달라는 아버지에게 나는 불평만 가득 늘어놓았었다. 그때 느끼셨을 아버지의 상처가 곧 나의 상처가 되는 것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나도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세월도 상처도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아버지 등 뒤에서 자잘하고 뻔한 질문들을 두드리던 어린 날의 내가 보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넓은 등 뒤로 자상한 아버지의 화답이 단비처럼 내린다.

 자전거가 지나간다. 뒤에 앉은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자전거 바퀴는 왜 두 개에요?”
 아이가 대견하다는 듯 아빠는 나팔꽃처럼 대답한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왜냐면 나눠져서 덜 힘들고 외롭지 않을 테니. 사이좋게 둥글둥글 살아가라고 두 개이지 않을까”
 아빠와 딸의 함박웃음이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 속으로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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